신앙_설교정리

260118_설교정리_성령의 감동과 울림을 인식하라 (막11:1~3)

서정원 (JELOME) 2026. 1. 18. 20:22

○ 말씀 전문

[마가복음 11장 1~3절]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 받은 말씀

아무리 좋은 말도 그 말에 대한 감동과 울림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 부는 바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명언도 내게 울림을 주지 못하면 그냥 두 귀를 통해 지나쳐가는 소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사건과 말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키고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습니다. 책 한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아무런 울림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 반면에, 어떤 책은 첫 페이지부터 페이지마다 감동과 울림을 받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가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지만 많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이끌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남기셔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늘 가까이 하고 계십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동행하게 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말씀에 민감하여야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울림을 받고 날마다 성숙해 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성령의 감동과 울림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되려면 ...

 

1. <주가 쓰시겠다> 라는 성령의 감동을 인식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두 제자를 마을로 보냅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인식해야 할 성령의 감동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 입장에서의 김동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겸손함입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님이 명마를 불러 타시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또한 그 나귀 새끼 조차도 영원히 소유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입성할 때 잠시 빌려쓰고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내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사는 동안 빌려 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영원히 내것인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나귀 주인 입장에서의 감동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강제로 징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말씀을 듣자마자 즉시 보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가진 자를 찾지 않습니다. 쓰시겠다 하셨을 때 주저없이 기꺼이 내어놓을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가진 달란트든, 내가 가진 시간이든, 내가 가진 부든, 내가 가진 욕심이든, 하나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주저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안내팀으로 부르든, 찬양대로 부르든, 전도사로 부르든, 교육으로 부르든, 부르심에 민감하고 부르심에 감동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째는 나귀 입장에서의 감동입니다. 나귀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자신을 불러 타겠다고 기대하겠습니까? 보잘것 없는 짐승이라 여기고 있을 때 주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을까요? 그것도 만왕의 왕이 타시겠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요? 쓰임받는 기쁨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집사님 한 분이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선교사님이 오시면 휴가를 내고 자기의 차를 이용해서 전도사님을 모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 할 때면 밤이든 낮이든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분은 드러난 분은 아니셨지만 자기를 불러주시는 분에게 기쁨으로 자기의 것을 드렸습니다. 그 분을 보면서 참으로 복된 분이시다 하는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2.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의 책망을 인식하라

12절부터 14절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두 번 맺습니다. 첫번째 열매는 4월 경에 열립니다. 이것을 '파게'라고 부릅니다. 이 때 열리는 열매는 볼품없고 많이 열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제철인 8,9월에 열리는 무화과는 달고 주렁주렁 열립니다. 이 때 열리는 무화과를 '테에나'라고 달리 부릅니다. 그런데 첫 열매 시절인 4월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제철이 되어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볼품 없고 달지 않는 열매일지라도 4월 경에 열매를 맺는 나무에라야 제철에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때는 아마도 4월 계절이었을 것입니다. 4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철에 멋진 열매를 맺으려면 초경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마할지 우리는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 책망을 그냥 책망으로만 듣지 말고 성령의 감동의 인식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울림으로 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복음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처음부터 엄청난 열매를 맺기는 어렵지만 작은 열매라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맺는 열매가 비록 작고 보잘껏 없다 하더라도 복음 열매의 단초, 생명의 단초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더라도 선데이 크리스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신앙 인생이 됩니다.

내 신앙응 되돌아 보고 영적 성장이나 삶의 변화가 없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파게가 없거나 테에나가 없는 것입니다. 2026년을 시작하면서 내 삶에, 내 신앙에 영적 파게가 열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예배드리는 삶에 변화를 주고, 말씀 읽고 묵상하는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에 변화를 주는 '파게'의 열매를 맺어가는 새로운 시작이 있는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인식하라

15절부터 17절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뜰과 뜰로 들어가는 곳에 설치된 안나스 상점도 포함합니다. 성전에 예배를 드리는 오는 사람들은 예수살렘 성민들 만이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서 옵니다. 그들이 먼 길을 예물을 갖고 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안나스 상점에서 제물을 사서 드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나스 상점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하여, 자기들이 결탁한 상점에서 산 제물들만 허락했습니다. 이를 등에 엎고 상점들도 폭리를 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고 뒤짚어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성령의 울림을 받아야 할까요?

어떤 교회에 동남아에서 오신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나오셔서 조용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목사님이 '여기가 뭔데 그리 좋으세요?'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여기에 오면 아무도 자기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없고, 다들 조용히 기도하고 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떤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른 갈등과 판단과 눈치 없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인가를 연구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①복음이 살아있는 교회, ②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③말씀과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뜨거움이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뜨거움이 있는 교회인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필그림하우스에 머무러면서 계속 말씀 하나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를 향해 그들은 부흥한다고 들뜨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행여 우리도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 때문에 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워룸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기도할 일이 있을 때마다 워룸이라 정해 놓은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던 주인공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기도하는 공간, 워룸이 있는 집에 살고 있는가 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있는 시간 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내 이 집이 정말 내가 기도하는 집인가 싶었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을 회상하고 정리하면서, 날마다 아침으로 성경 말씀 한 장씩을 읽고 묵상하며 느꼈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성경을 하루에 한장을 읽고 묵상하고 그것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 3번째로 돌고 지금은 세번째 요한복음까지 와 있습니다. 그런데 첫번째 읽고 묵상했을 때와 두 번째, 그리고 세번째 읽고 묵상한 기록이 다 다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읽고 묵상할 때마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 다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날마다 주시는 새롭게 주시는 감동을 통해 주가 저를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을 믿으며 친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