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전문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받은 말씀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알지 못한 채 28년 동안 홀로 정글에 숨어 지냈던 일본군 요코이 쇼이치, 그의 이야기는 착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때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육군 중사였던 요코이는 괌으로 파견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미군이 상륙하면서 일본군은 궤멸되었고 요코이는 전사자로 취급되었으며 고향의 가족에게 전사 통보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호적상 '저 세상 사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전후 미군은 잔류병을 향해 "일본은 패전했습니다.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습니다"라고 전단이나 방송을 통해 투항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요코이는 그것을 미군의 함정이라 생각했고 일본군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동료 2명과 함께 정글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오해가 얼마나 안타까운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실화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오해가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앞에 주님이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1차적으로는 그의 물질관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떠난 것입니다.
그럼 그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떠났을까요?
1.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에 대해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사람을 소개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우자를 소개받을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소개하는 사람을 통해 들은 그 사람에 대한 실체가, 실제로 만나다 보면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결혼을 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그 사람 자체를 실제로 심층적으로 알게 되면 더 많은 괴리를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소개 받을 때는 큰 장점이 없는 사람으로 소개를 받았지만 실제 그 사람의 실체를 알고보니 훨씬 멋진 사람임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 들어서 아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아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는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알게 되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선한 선생은 랍비를 의미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 그리스도로 안 것이 아니라 단순한 랍비 정도로만 들어서 알았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첫 단추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랍비 쯤으로 알았습니다. 그럼 교회에 다니는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수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서만 알고 예수님 자체를 알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지나 않을까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주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와 늘 함께 밥을 먹는 분입니다. 구원 자체도 중요하지만 같이 살아가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일어나면 예수님을 생각하고 집을 나서면 예수님께 길을 묻는 늘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로렌스가 고백했던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가 정답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그 사람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영성 일기를 수년간 쓰고 있습니다. 그 영성 일기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성 일기를 쓰는 만큼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 좋습니다.
2026년 한해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아가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구원에 대한 잘못된 오해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청년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어떤 행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고 오해입니다.
그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예수님은 일차로 율법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그는 그 율법은 이미 다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그를 깨우치기 위해 다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국 그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한 최종 목적은 그가 모든 재산을 털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도덕임 이면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탐심과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 하면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오십보 백보입니다. 내면에 있는 죄성의 잣대로 보면 모두가 다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내 행위로서는 도저히 선한 자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님께 의지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수 밖에 없음을 깨닫기를 기다리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고 그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를 때 주어집니다. 그 진정한 구원의 은혜로 살아가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제자로서의 대가 지불이 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왔으면서도 그 예수님을 예수님에 대해서만 아는데 그쳤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 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떠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에서 늘 부담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부담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시간 투여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 보다고 세상살이에서의 쾌락과 즐거움을 내려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20절부터 2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가 예수님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자기가 가진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대가 지불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대가 지불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대가지불 면에서 다르면 무리가 될 수도 있고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만났더라도 그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없으면 무리로 머물 수 밖애 없습니다.
무리로 머무러지 않고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복음 앞에서 무너져 봐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 복음에 감명 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지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임에서 그쳐서는 언제까지나 무리의 수준에 머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신앙생활을 쉽게 할 수 있느 모든 조건이 주어져 있는 나라입니다. 누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지도 않습니다. 문을 나서서 몇발자국 가지 않더라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과연 복음을 듣고 인생이 변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성도가 아니라 진짜 성도로서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2026년에는 우리 교회가 그런 변화의 삶을 주는 교회가 되고, 우리 모두가 진짜 성도가 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_설교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60125_설교정리_주님이 참 고마워하는 인생 (막12:41~44) (1) | 2026.01.25 |
|---|---|
| 260118_설교정리_성령의 감동과 울림을 인식하라 (막11:1~3) (2) | 2026.01.18 |
| 260104_설교정리_꺾이지 않는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라(막10:46~48) (0) | 2026.01.04 |
| 251228_설교정리_왜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까 (막9:21~24) (0) | 2025.12.28 |
| 251225_설교정리_성탄절을 통해 발견해야 할 예수님 (마1:18~23) (1) | 2025.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