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331_설교정리_부활절에 맛보는 회복 탄력성(요21:15~17)

서정원 (JELOME) 2024. 4. 1. 07:12

○ 말씀 전문
[요한복음 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받은 말씀
역경과 어려움이 오히려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떨어져 본 사람이 어디로 올라갈 지를 알고, 바닥을 쳐 본 사람이 오히려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의 탄력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닥을 쳤던 베드로를 예수님이 다시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 지를 예의 주시해 봄으로써 어떻게 해야 힘들고 지쳐 있는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지, 또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나라의 경제가 회복되고, 의료 분쟁으로부터도 회복되며, 암담하기만 한 정치 현실에도 회복의 은혜가 임할 수 있을지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뭘 먼저 회복해야 전인적격인 회복이 이루질 수 있을까요?
 
1. 무너진 신앙고백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신앙고백은 그 앞의 1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대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빌립보 가이사랴란 빌립보라는 도시 이름에 당시의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여 부른 것입니다. 도시 이름에 가이사랴라고 붙여 불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는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웅장함이 있는 도시여야 하며, 또 하나는 도시 내에 황제의 동상이 있고 모든 시민들이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의 예수님의 질문은 이러한 환경에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도 베드로는 주저없이 16절과 같은 신앙고백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붙잡히자 그의 신앙고백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호수로 부르셨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디베랴는 로마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처음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던 빌립보 가이샤처럼 다시 황제 논리가 숨쉬고 있는 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빌립보에서 했던 질문과 디베랴에서 한 질문의 근본은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의 신앙을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탄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역동적입니다. 그 어느 곳 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주변에 삼성과 엘지와 같은 대기업이 있어서 그 어떤 도시보다도 시민들이 넉넉하게 사는 곳입니다. 로마의 황제 대신에 세상의 권세가 넘치는 곳입니다. 황제 논리가 그대로 살아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곳에서 오늘 부활절을 통해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다시 신앙고백을 회복하여 축복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 말씀이 임하는 복된 부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21장은 부활 후에 두번째의 만남입니다. 두번째 만남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서먹서먹 하기만 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관계의 변화는 이미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입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멀찍이서 따라갔습니다. 따라가기는 했지만 자기에게 피해가 없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습니다.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길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눅가복음 22장 61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이 있은 후 예수님이 뒤돌아 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증오와 멸시의 눈이 아니라, 베드로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눈빛으로 ‘그럴 수 있다 베드로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을 본 베드로는 그제서야 통곡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현장인 디베랴에서 만났을 때, 베드로는 그때 그 부인했던 것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관계성이 깨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늘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부모 관계에서도 관계가 깨어지면 온전한 부자관계를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형제지간에도 앙금이 남아있으면 여전히 만나는 것이 껄끄럽고 우애를 이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바람직한 관계를 회복하려면 깨어진 관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함없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주님과의 관계는 언제든 회복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낯을 들 수가 없다고 자꾸만 주저하기만 한다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회복되기 어렵고 우리의 신앙이 한발도 더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용기를 내어 주님 앞으로 나가 깨어진 관계부터 회복하기 바랍니다.
 
3. 잃어버린 사명과 우선순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깨어지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베드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듯 했습니다. 사명도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명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오늘 말씀 분문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물고기를 잡는 것이 네 사명이 아니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이 사명임을 다시 일깨워 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곧바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부터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주님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하시면서 베드로가 이끌어갈 ‘이 사람들을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생활하다 보면 미운 점도 보게 됩니다. 부족한 면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 시험이 닥쳐오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는 교회 안에서도 같이 섬기는 교인들을 모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의 힘 만으로는 아내 마저도 항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자녀들 조차도 내 사랑의 힘 만으로는 항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실망스런 얼굴을 보고는 다투기도 합니다. 오히려 원수 보다도 더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게 찾아온 사랑의 위기를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웃도 가족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시 회복하여 힘차게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