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407_설교정리_주님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 (얍1:1~3)

서정원 (JELOME) 2024. 4. 7. 16:50

○ 말씀전문

[야고보서 1장 1~3절]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받은 말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 제물포 항에 두 명의 범상치 않은 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아펜젤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언더우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우리 한국 교회 개신교의 시작을 가져왔습니다. 인천에 도착한 두 사람 중 언더우드는 곧장 서울로 들어가서 한국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서울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장로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반면 아펜젤러는 인천에 그대로 머물면서 첫밤을 보내고 인천의 일반 시민들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여 첫 감리교 교회인 내리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첫발은 참으로 힘든 걸음이고 중요한 시작입니다.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창한 사람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를 담당했던 야고보는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가야 하는지 깨닫고자 합니다.

그럼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1.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총 4명의 야고보가 나옵니다.

유다의 아버지인 야고보

세대베의 아들인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바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에는 예수님을 신앙적으로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뛰놀며 한 형제로서 자란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야고보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지나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만나면서 였습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이 특별히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8절입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그 후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만난 그는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감독이 되었던 그는 나중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주 되심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야고보서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며 형이 아니라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을 형을 넘어 새로운 인격으로 분명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변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만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자로 믿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두 믿음을 선명히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행함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를 행함의 서신이라 부를 정도로 야고보서는 온전한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행함을 강조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은 번지레하게 잘 하면서도 정작 행함이 없는 것을 봐 왔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3장 2~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은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는 행함이 있으나 삶을 통한 진정성 있는 행함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자기가 본 형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위까지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진정성 있는 행위의 삶을 살았음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요하임 바흐는 신앙체험에는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궁극성 (Ultimacy), 하나님의 Touch

둘째, 강렬함 (Intensity), 전율을 느낄 정도의 강렬함

셋째, 전체성 (Totality), 삶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

넷째, 행함 (Act) 라고 했습니다.

신앙체험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 믿음에 진정성이 있는지, 내 삶에 믿음의 행함이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장로가 하는 시공사는 믿을 게 못된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믿는 자로서의 행함이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책에만 밑줄을 그을 것이 아니라, 내 삶에도 밑줄을 그으며 살아가야 하고, 삶의 예배와 삶의 제사를 지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과 3절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5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기도를 중시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중요시 하는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형인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리와 시간까지도 정해 놓고 습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예수님의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여겼던 부활이 이루어짐을 목격했습니다. 그 이후 그에게 별명이 생겼습니다. ‘낙타무릎’ 이라는 것이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기도로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뭉텅해졌던 것입니다.

낙타무릎이 야고보의 별명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낙타에 대해 더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곤 낙타에겐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낙타는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무릎을 꿇습니다. 사막 여행에 맞게 몸이 최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낙타이지만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는 것이 현명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의 시기가 도래하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둘째는, 낙타는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지기 위해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은 자기 낙타에 얼마만큼의 짐을 실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우리도 인생의 시련과 문제 앞에서 주님이 주시는 짐을 믿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고 무릎을 꿇고 순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데 핑계가 많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기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서는 안됩니다. 그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이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능력이고 기도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하는 것임을 깨닫고,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은혜를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