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317_설교정리_죽기 전에 물어야 할 인생 질문 세 가지 (시27:1~4)

서정원 (JELOME) 2024. 3. 18. 05:43

○ 말씀 전문

[시편 27편 1~4절]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받은 말씀

사람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질문의 깊이가 다릅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질문을 깊이 하고 사는 사람일수록 가치 있고 의미 있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깊은 질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나고 나면 후회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자기 인생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유추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이 다윗을 위대한 다윗이 되게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스스로에게 어떤 인생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어떤 자답을 구해서 살아갈 것인지를 배웠으면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문 자답을 해야 할까요?

 

1. 하나님 그 한 분 만으로 만족해 보았는가?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다윗은 늘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자신을 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양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쉽게 더렵혀집니다. 우리는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 양은 하얗고 털이 뽀송뽀송한 동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양이 자라는 곳에 가 보면 더렵고 이게 양인지 염소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늘 돌봐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둘째, 시력이 약하고 방향 감각이 무딥니다. 2~3미터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선 양이 길을 잘못 가더라도 그냥 졸졸 따라가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제대로 양육하려면 꼭 목자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셋째, 양에게는 특별한 자구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강한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보호가 절실한 동물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이 양으로 생각하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간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두면 죄에 대해 쉽게 더렵혀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우리를 보살피고 인도해 주실 목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4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위해 한번도 옷을 사 주신 적이 없습니다. 커 오는 내내 형들이 입던 다 헤진 옷을 물려받아 입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지는 것은 늘 부족한 상태였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시편 23절 5절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고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의 삶은 늘 부족하고 힘든데 어떻게 잔이 넘치는 삶이 있을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앞의 1절과 2절을 통해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초식동물들은 좀처럼 누워서 쉬거나 자지 않습니다. 눕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주어지면 누워서 쉬기도 하고 자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가 자기 곁에 있을 때입니다. 이 한가지 조건만으로 양은 평안하고 만족한 삶을 삽니다.

대전에 있는 신학대학을 다녔을 때입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구한 일자리는 부천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경비를 서는 일이었습니다. 월요일 새벽에 일이 끝나면 부천에서 1호선과 2호선을 갈아타면서 전철을 타고 반포로 가서 다시 그곳에서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기를 반복했습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기숙사로 들어가 좀 쉬고 수업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발걸음은 늘 학교 강당을 향했습니다. 왜 이토록 어려운 길을 가게 하시냐고 울부짖는 기도가 한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깨닫곤 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친 삶일지라도 그렇지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자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가’ 그리고 그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 그 한 분 만이 나의 목적이 되었는가?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다윗 하면 생각나는 것이 그의 광야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광야 보다도 더 아프고 힘들었던 때는 아마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쫓겨나 있을 때 아비아달과 사독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는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옥쇄에 해당합니다. 얼마전에 끝난 고려거란전쟁에서 헌종이 거란군에 쫓겨서 남으로 남으로 피신할 때,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신하가 보자기에 싼 옥새만을 안고 따라 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언약궤는 아직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권이 다윗에게 있다는 증표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아비아달과 사독에게 그 언약궤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으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15장의 24절과 25절입니다.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왜 그랬을까요? 그는 법궤를 자기 안위를 지키는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삶에 대한 확고한 동기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한 분 그 자체였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늘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인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고 보물도 제사용으로 사용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다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꾸짖자 그가 보인 반응이 사무엘상 15장 30절과 같았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비록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더라도 신하들 앞에서는 자기를 높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자기 이득을 위한 수단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을 내 인생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내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자문을 통해 지금부터라도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내 인생의 이유요 동기요 목적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 나의 인생의 최선을 드려보았는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올 때 동원했던 장정이 무려 3만명이었습니다. 법궤 하나를 가져오는데 이런 큰 인력을 동원한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옮겨 오는 과정에서도 여섯 걸음을 떼고는 멈추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옮겨 온 거리는 무려 21Km에 달합니다. 그 21Km 동안 이동하고 멈추고 제사하기를 반복한 것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최선을 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상 6장 13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한 기록은 곳곳에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또 마노와 가공할 검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모든 보석과 옥돌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그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한 것은 왜 였을까요? 자기 안위를 위해서 였을까요? 자기 출세를 위해서 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자기의 최고를 드릴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장이 힘든 직장 생활을 감내하면서도 행복한 것은 자신의 헌신을 기쁘게 줄 수 있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만 원짜리 음식도 부담스러워서 삼천 원짜리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행복한 것은 아낀 돈으로 딸에게 좋은 옷 입히고 맛있는 것 사줄 수 있다는 행복한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가치 있고 후회 없는 인생이 되기 위해 내 가장 좋은 최선을 그 하나님에 드리고 있는지 자문하고 자답해 봐야 하겠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깊은 자문 자답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