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324_설교정리_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시51:10~12)

서정원 (JELOME) 2024. 3. 25. 07:57

○ 말씀 전문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받은 말씀

조창인의 [가시고기]는 백혈백을 앓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던 아버지가 자신마져도 간암에 걸려 아이를 끝까지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아픔과 부성애를 그린 소설입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되는 구절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생을 마감한 그들이 그토록 살고싶어 하던 내일이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정작 의미없이, 가치를 잊은 채 살아가는 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제 우리 교인 가족의 임종예배를 준비하면서 문득 가시고기가 생각났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생을 그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돌아보는 12번째 말씀입니다. 연초부터 지금까지 다윗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 오면서, 늘 그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풍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레슨은...

 

1.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은 주께 있음을 알라

다윗은 원래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윗의 부모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모든 자식들을 불러 사무엘에게 보여주었지만 막내인 다윗은 부르지도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부모에게 조차도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통일 이스라엘을 이룬 자로 거듭납니다. 

미미했던 그가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역대상 29장 12절입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붙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강하게 하고 크게 하는 근원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단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미미한 존재에서 큰 인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표적인 소심남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미디안을 정복하는 용사로 거듭납니다. 사사기 6장 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그리고 34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하나님이 기도온과 함께 계시고, 여호와의 영이 임하심으로 인해 용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두면 아무것도 아닌 우리입니다. 미미한 존재로 살다 갈 존재일 뿐입니다. 늘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게 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큰 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되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다시 한번 붙잡고 시작하는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사역 초창기에 겪었던 일입니다.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자 갑자기 천국에 대한 소망도 사그라지고 대신 좌절과 상실감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한 결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슬럼프에 빠지는 것은 구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 11절과 12절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래서 다윗도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쁨을 빼앗는 주범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시편 6편 6절입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은 눈물이 침상을 적실 정도로 깊이 회개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복음을 단단히 붙잡는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십자가 앞으로 나갈 때 우리는 내 본질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내 구원을 위해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그 기쁨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이 [행복]이라는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행복]를 부르는 그 모습과 얼굴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가식 없는 그들의 기쁜 얼굴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일상 속에서도 늘 근심과 걱정이 앞서 있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런 기쁨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하나 만으로도 충분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기쁨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3.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라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느 교회로 가장 먼저 가실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런 궁금증이 없다면 우리는 내 신앙생활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느 교회로 가실지 그 대답이 사도행전 15장 16절에 있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다윗의 장막으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솔로문의 성전에 비해 외관상으로는 형편없는 곳입니다. 왜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으로 가시겠다고 했을까요?

첫째는 다윗의 장막에는 장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궤와 그 법궤를 가리는 가림막 정도만 있는 임시 처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든 언제든 그 장막으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의 성전에는 아무나 다가갈 수 없도록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성막에도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되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딱 정해져 있었고 그 정해진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때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둘째는 다윗의 장막에는 꺼지지 않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법궤를 가져온 그 길도 멀었고 가져오면서도 최선을 다해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옮겨 온 후에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조를 짜서 24시간 그침이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대부분의 노래가 이 때 예배를 드릴 때 지어졌던 노래들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상징인 파란 불꽃이 다윗의 장막에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 건물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교회로 오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배척하고 갈등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예수님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로 가득한 교회에는 예수님이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불꽃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교회를 택해 오실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예수님이 기쁜 마음으로 주저없이 우리 교회로 행해 오실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