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225_설교정리_6 to 7의 정신을 기억하라 (삼하6:12~14)

서정원 (JELOME) 2024. 2. 25. 22:45

○ 말씀전문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 받은 말씀

짐 윌리스의 [가치란 무엇인가]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잘못된 물음에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답을 얻어도 별로 의미가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잘못된 물음을 너무나 자주 던지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우리는 형식적인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은 현재와 같은 시장 질서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삶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간디의 7가지 사회적 대죄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원칙없는 정치, ② 노동없는 부, ③ 도덕없는 상업, ④ 양심없는 쾌락, ⑤ 인격없는 교육, ⑥ 인간애 없는 과학, 그리고 ⑦ 희생없는 예배가 그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희생없는 예배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는 장면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법궤인 언약궤를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다윗 이전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승리의 마스코트 쯤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사울은 그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블레셋은 그 언약궤를 가진 후에 계속되는 재앙과 저주 때문에 그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언약궤를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은연중에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된 후 맨먼저 이 언약궤를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가장 먼저 붙들고 옮겨오고자 함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렛슨은...

 

1. 하나 (One thing)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망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한 사모함이었습니다. 그의 열망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열망과 열정이 얼마나 크고 간절했는지 그 법궤를 옮겨올 군사의 수를 보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단순하다면 단순한 법궤 하나를 가져오는데 무려 3만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있고, 그리고 다윗 자신도 손수 거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사모하고 있고,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게리켈러는 그의 저서 [One Thing]에서 '성공에 관한 잘못된 여섯 가지 믿음' 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모든 일이 다 중요하다

② 멀티태스킹은 곧 능력이다

③ 성공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온다

④ 의지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

⑤ 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⑥ 크게 벌이는 일은 위험하다

그는 자신이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 '모든 일은 나름대로 다 중요하다'는 사고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매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점차 많아지기만 할 뿐 정작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며, 악순환만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결국 가장 주요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두더지 게임과 도미노 게임에 비유하였습니다. 두더지 게임은 머리를 쳐드는 두더지 머리를 망치로 쉬지않고 열심히 내려치지만 두더지는 끝없이 머리를 쳐듭니다. 반면에 도미노 게임은 핵심적인 부분만 찾아 충격을 가해주면 단번에 모든 도미노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를 뽑으라면 무엇을 뽑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One Thing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도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 27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6 to 7의 정신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오는데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그의 철저한 원칙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그것은 바로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역대상에 보면 숫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로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 걸음 마다 7마리의 제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무려 21Km나 계속했습니다.

여기서 6걸음의 6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즉 인간의 수고와 노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은 하나님의 숫자로서 완성 혹은 안식을 뜻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완성시키심을 기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기뻐시게 하는데 그 영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쏘는 훈련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영점 사격입니다. 총이 가지고 있는 타겟 특성을 알고 거기에 탄착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영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에서 이 영점 맞추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6일 동안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다시 흐트러진 영점을 교회로 나와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인생의 탄착점이 타겟에 정확하게 맞추어 살 수 있게 됩니다. 

 

3. 신앙의 편의와 편리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한 6 to 7의 정신을 가지는 원칙 외에, 다윗에게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에 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멘' 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기서도 '메어오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여기서도 '메고 들어거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여기 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7장 5절입니다.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으며" 보시다 시피 언약궤는 원래 만들 때부터 '메게' 되어 있습니다. 

멘다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는 수고와 헌신을 감내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 메는 수고와 헌신을 회피하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에 대한 기록이 본문 2절부터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와 아효가 그 언약궤를 메는 수고를 피하고, 손쉽게 옮기려고 수레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들이 뛰어 언약궤가 흔들리자 그것을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손으로 붙잡다는 말의 원어는 '아하쯔'입니다. '아하쯔'는 '자신의 소유를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붙잡았다는 것은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고 옮기도록 되어 있는 언약궤를 수레로 옮기려는 편의주의 편리주의로 인해 그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못한 그들의 마음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되었던 것이 온라인 예배인데, 지금까지도 기회만 되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은혜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먼길을 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고, 편리한 온라인 예배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언약궤를 메는 수고를 피하고 편의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아주시는가 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매너리즘, 익숙해짐 일수도 있습니다. 관심있는 일부터 하고 관심이 가는 것에 집중하는 분주함 일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1등이고, 해야 할 일이 2등이며, 하나님은 겨우 3등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언제나 내가 1등입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일으켜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도 하나님이 1등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