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전문
[출애굽기 3장 10~12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받은 말씀
요셉과 바울, 그리고 느헤미야에 이어 오늘은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레마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엘 무디는 모세의 120년 인생을 3단계로 나누어 소개했습니다. 그는 모세의 1단계 인생을 Somebody의 시기라고 했습니다. 애굽왕자로 살면서 스스로를 잘 난 사람으로 생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2단계를 Nobody의 시기로 정의했으며,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던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는 출애굽의 시기로 무디는 이 시기를 I am God's buddy라고 표현했습니다. Buddy는 친구의 애칭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구처럼 지냈던 시기를 뜻합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을 갖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찾아오더라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구처럼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주고 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모세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취해야 할 레마의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세를 통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귀한 렛슨은 ...
1. 왜곡된 자아상을 벗어버려라
우리의 인생을 왜곡시키는 자문자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자문 자답으로 스스로에게 잘못된 자아상을 형성시키고, 그 왜곡된 길로 자기 인생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로서 자기자아 의식을 형성시킵니다. 나는 일류대를 나왔으니 일류 사람이라고, 일류 기업에 다니고 있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스스로를 높은 자리로 올려놓습니다.
반면에 일류대를 나오지 못한 사람들, 일류 기업에서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늘 기를 펴지 못한채 삽니다.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떳떳하게 나서지 못한채 삽니다.
② 나는 지금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학벌이나 재산을 자기 자아로 삼습니다. 직장에서 고졸이라고 천대하고, 백화점에서 점원에게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자기 평가, 자기 자아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돈이 없어서라거나 학벌이 좋지 않다는 생각으로 자기 폄하를 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③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내 자신에게 떳떳한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더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합니다.
출애굽이 시작되는 초기의 모세에게도 이런 왜곡된 자아의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말씀을 꺼내자마다 모세가 보인 모습입니다. 그의 즉각적 반응은 '내가 누구이기에'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신에게 주입시킨 자아상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애굽의 왕자로 있었을 때였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동 지팡이 하나 밖에 없었던 그는 애굽으로 가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시선이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자기 정체성을 이루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하나님의 일에 맞딱뜨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이런 왜곡된 자아상,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리고 4절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왜곡된 자아상, 왜곡된 정체성입니다. 돈과 사람을 바라보며 세운 왜곡된 자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우셨으며, 그 분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는 올바른 자아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복된 한주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나의 무능이 그 분의 전능을 경험하길 기도하라
어떤 분의 기도를 들으면서 참으로 귀한 기도라는 울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 나의 무능함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가리워주옵소서"였습니다.
왜곡된 자아로 하나님 앞에서 주저하는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이 하신 반응입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우리는 기도할 때, 내게 주어진 문제에 대한 명확한 솔루션이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기도 제목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애매한 응답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응답을 받으면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런 마음을 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이런 비유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응답을 아주 잘 비유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느날 코끼리와 개미가 같이 등산길에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옮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했던 개미가 이 큰 바위를 어떻게 옮기지 하면서 걱정만 했습니다. 그 때 코끼리가 자기가 그 바위를 옮기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코끼리는 말을 들은 개미는 '네가 누구이기에...'였습니다. 코끼리는 자기의 힘이 얼마나 센지, 어떻게 옮길 것인지 개미에게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걱정하지마! 내가 옮길께'라고만 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봤자 개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걱정마! 내가 옮길께'였습니다.
우리의 염려, 우리의 걱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 전능하심을 설명해도 개미인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가진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하심으로 그 전능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하심이고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음성이 들리는 새로운 한주, 이 음성으로 평강을 누리를 복된 한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되는것 보다 다워지는 삶에 도전하라
신앙에서는 강의실용 신앙이 있고, 실험실용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실용 신앙은 이론적으로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신앙입니다. 반면에 실험실용 신앙은 삶을 통해 체험이 있고 간증이 있는 신앙입니다. '기도하면 된다더라'는 강의실용 신앙인의 기도이고, '기도하면 돼'는 실험실용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기도는 강의실용이 아니라 실험실용이 되어야 함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당시만 해도 모세의 신앙은 강의실용이었습니다. 요게벳을 어머니로 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체험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한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본질과 실체를 모른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실체, 즉 진짜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걸고 올인하기 어렵습니다. 진짜이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모세로서는 애굽에 가서 사람들 앞에 설 엄두가 나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올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 진짜이신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 집사가 되면 만날 수 있을까요? 권사나 장로가 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목사가 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집사가 된다고, 장로가 된다고, 목사가 된다고 해서 진짜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다운 집사, 장로다운 장로, 목사다운 목사가 될 때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감투와 직위와 직책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되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다워짐'으로 평가받고 인정받습니다. 진정한 삶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워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장가가서 아빠가 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아빠다운 아빠가 중요합니다. 남편이 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다운 남편이 되지 못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봐야 할 시각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아멘'을 부르짖는 자가 아니라, 그 아멘이 삶 속에 심겨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접한 귀한 글귀가 있어서 그 글귀를 소개하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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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처럼 바쁘게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하철 안에서
수많은 얼굴들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셨다.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고,
누군가는 분노로 하루를 시작할 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다.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속여도 아무도 모를 일,
외면해도 상관없는 사람,
포기해도 이해받을 상황
그 때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떠올렸다.
손해를 선택했고
용서를 선택했고
진실을 붙들었다.
그래서 그의 하루는
조금 더 느렸고
조금 더 불편했으며
조금 더 외로웠다.
하지만 그 밤
사람들이 모르는 자리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주님! 오늘도 넘어지지 않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어떤 날은 무너졌다.
분노했고,
지쳤고,
믿음없이 말해버렸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다시 하나님께 나아갔다.
"주님! 저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그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사람을 향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살며
보이는 성공보다,
보이지 않는 순종을 택하는 삶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
그렇게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아
결국 그의 인생은 한 문장으로 남는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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