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60222_설교정리_<깨어있어라>는 주님의 알람 소리를 들어라 (막14:36~38)

서정원 (JELOME) 2026. 2. 22. 20:24

○ 말씀 전문

[마가복음 14장 36~38절]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받은 말씀

오늘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이 올라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겟세마네의 뜻은 '기름짜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진액을 모조리 짜냈던 것입니다.

지난 2월 18일부터 다가오는 4월 4일까지는 사순절입니다. 부활을 기대하며 사십일 동안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레슨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겟세마네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레슨은 ...

 

1.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알람을 인식하라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열심과 성의도 대단하지만 그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대부분 2~3개의 알람을 켜고 잠자리에 듭니다. 4시 반에는 일어나야 씻고 묵상한 후 교회로 가서 5시 30분 예배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눈을 뜨니 시계가 5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니 시계는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시침과 분침을 혼돈한 것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아침 첫 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새벽 일찍 일이 있어서 어둠을 헤치고 집을 나서면 예상보다 많은 차량들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알람에 귀를 열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삶의 일터에서도 제 시간에 깨어 있도록 귀를 열어야 하겠지만, 특별히  사순절을 맞이하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깨어 있도록 몸부림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라고 거듭 당부하십니다. 

32절부터 34절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원문에는 현재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명령형은 지속적, 반복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Stay here and keep watch. 37절부터 38절까지에도 나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님의 분명한 말씀은 '깨어 있어 기도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를 향해 하시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언젠가 대형교회 목사님과의 점심 약속이 있었을 때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상보다 길이 막혀 12시 10분 경에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10분 정도야 양해해 주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로비로 들어섰습니다. 약속 장소는 7층에 있었고 저는 로비의 한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7층에는 그 식당이 없습니다. 로비에서 양측으로 두 개의 건물이 있는 구조였는데 반대편 건물로 가야 하는 것을 무심코 다른 건물 엘리베이터를 탄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얼른 내려와 다른 쪽 건물로 향했는데 엘리베이터는 저층용과 고층용이 구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버튼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12시 30분이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당일 참석자 대부분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고 저는 제일 막내였습니다. 아무도 늦었다고 책망하지는 않았지만 등에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다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박목사야! 속상했지? 그럼 나는?", "너는 예배에 지각했을 때 미안하고 속상한 적 있니?"

선배 목사님들과의 약속 시간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직장에서의 약속이나 지인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 우리는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은 놓치지 않고 잘 지키고 있고 성실하다고 자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을 만나는 시간은 놓치고, 그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잘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잡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예배 중에도 딴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주님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묵상도 빼먹고, 기도도 빼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붙잡고, 말씀 앞에, 기도 앞에, 성령님의 음성 앞에 늘 깨어있는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내려놓음>의 기도의 샘플을 학습하라

어떤 기도가 좋은 기도일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한번 이상은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우리의 책장에는 "기도 하는법"이라는 책이 한 권 정도는 꽂혀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표본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어떠 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생생히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인간적인 기도였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고민스럽다면 고민스럽다고 있는 그대로를 아룁니다. 그렀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고백이 가장 솔직한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나 이 짧은 기도문 속에는 두 가지의 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솔직한 마음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직면한 그의 두려움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이 솔직한 고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내 뜻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나,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기도는 다릅니다. 무속신앙의 기도는 한마디로 '지성이면 감청'이라는, 결국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시면 그 계시 앞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지만, 그 뜻에 대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내 생각을 조율하는 것이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이전 교회에 있을 때 박사과정을 이수하기로 마음을 먹고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박사라는 타이틀이 있어야만 담임목사 청빙도 받을 수 있다는 말들이 공공연히 나돌던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든든한 배경도 없던 저로서는 더욱 간절한 소망이 박사학위를 받고, 이력서 속에 이 박사라는 타이틀을 넣는 것이었습니다. 남몰래 붙잡고 있던 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박목사야! 너 그 박사 과정에 대한 네 뜻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한동안 멍 했습니다. 내가 목회자로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하다고 여겼던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주님의 말씀에 "내려놓겠습니다"라고 따랐습니다. 정말로 내려놓고 목회에 집중했습니다. 수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박사학위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저에게는 정말로 내려놓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뜻을 내려놓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그것이 포장이 된 것일 때도 있습니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내려놓는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심이 분명할 때는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내려놓을 수 있도록 평소에 학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듯 해탈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무로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 꼭 내려놓기를 요청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이 뜻을 따라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위해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편을 아뢰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구하는 자리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멀찍이>의 신앙을 경계하라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될 때 아무도 그 곁에 없었습니다. 절대로 에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도 멀찍이서 눈치를 살피며 따라갔습니다. 랍비라고, 주님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길을 가실 때 그의 곁을 떠나갔던 실패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밀스런 단어를 5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결정적인 제자들의 수준이었음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5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그 단어는 바로 '멀찍이'입니다. 따라가기는 따라가는데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이 멀찍이는 물리적인 거리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거리를 대변해 준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리기는 하나 적당한 거리로 예배를 드립니다. 헌신을 하기는 하나 멀찍이 수준으로 헌신합니다. 봉사를 하기는 하나 체면을 차리기 위해 적당히 봉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멀찍이가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이요 신앙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입니다. 로마 대화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이 대화재로 방화 주범으로 내몰린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받았고 그 주동자로 베드로가 지목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피하기를 요구했고 그들의 성화에 따라 베드로는 도망길에 오릅니다. 그가 로마를 떠나가는 길에 맞은 편에서 로마를 향해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 때 그가 부르짖은 말이 바로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의 대답입니다.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양을 돌보러 가노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다시 발길을 돌려 로마로 향했고, 그는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그의 멀찍이 신앙이 비로소 떨어져 나간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내 신앙에 역동성이 사라진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그 첫사랑을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 첫사랑의 달콤함을 잃버버리고, 신앙의 뜨거움과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을까요? 진범은 바로 이 '멀찍이' 신앙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베드로의 멀찍이 신앙이 남의 모습이 아니라 내 모습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멀찍이 신앙을 경계하고, 주님을 따라가되 잘 따라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