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721_설교정리_다하는 순종, 끝까지 하는 순종이 능력이다 (창6:5~8)

서정원 (JELOME) 2024. 7. 23. 08:46

○ 말씀 전문

[창세기 6장 5~8절]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받은 말씀

작금의 세상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하며 한숨을 내쉽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 손주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힘들지 모르겠다'며 걱정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자꾸한 악한 모습으로 물들어가는 듯 해서 하는 걱정이요 넋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걱정만 하지 뽀족한 대안이 없습니다.

노아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보다 더 했을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악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로 세상을 쓸어버릴 때도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하시어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의 이러한 안타까운 세상에서, 우리의 일터와 가정, 그리고 자녀들 위에 노아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를 바라며, 그렇다면 노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 그분과의 일상의 동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삶을 대변하는 핵심적인 구절이 8절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었는지를 바로 다음 절인 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핵심적인 단어는 '완전한 자', 그리고 '동행'입니다.

그냥 쉬운 말로 동행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동행하는 길의 상태를 상상해 보면, 쉽게 동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름날 냄새가 지독한 사람이 버스에 동승하게 되면 코를 막고 도망을 칩니다. 노아가 탄 방주는 깨끗하고 쾌적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하나만 있고, 사방이 다 밀폐된 공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는 온갖 짐승들이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악취가 코를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1시간도 아닌 40일간을 같이 동행했습니다. 진정한 동행은 힘든 상황에서도 버텨내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동행입니다. 이 동행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애굽 총리까지 오른 요셉을 부러워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는 부모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셉이 총리의 요셉이 되기까지는 엄청난 고난이 있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진 세월 속에서도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우리의 삶에도 환란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악한 사람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이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비법은 단 하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굴곡있는 동행이 아니라 일상의 동행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다 준행하는 순종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름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순종하며 사는데도 힘든 일이 자꾸 생긴다고, 걱정거리가 그칠 날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왜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여길까요? 

그 이유를 오늘 노아를 통해 깨닫게 해줍니다. 6장 22절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영어성경에서는 "Noah did everything"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7장 5절에서는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Noah did all"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순종의 핵심은 '다', '끝까지', 'everything', 'all'입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포크레인이 있고 전동드라이브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톱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방주를 맨손으로 다 지었습니다. 끝까지 지었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요 진정한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름 순종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다하는 사람이 더뭅니다. 끝까지 다하는 것이 능력이 됩니다. 은혜를 이루는 능력이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순종에는 '노력해서 하는 순종'과 '죽음으로 하는 순종'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으로 하는 순종이란 진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있지만, 내 속의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를 온전히 버리지 못하는 순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자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그 순종이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처럼 흘어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는 이 한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음으로 살려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 속에 '허영의 시장'이라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신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실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 ① 옷이 그들과 다르다, ② 말투가 그들과 다르다, ③ 허영의 시장을 바라보는 눈이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죽임을 당합니다. 주인공인 그리스천은 이를 통해 깨닫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가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하소서'

이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온갖 유혹이 난무하는 허영의 시장을 통과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눈만 돌리면 믿음을 버리라는 유혹이 가득합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그런 유혹의 안개 속에 가려 사라버버리기도 합니다. 노아라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악한 세력들, 이웃들이 끊임없이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외친 것은 '주님 내가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하소서' 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자가 되려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난하고 불평하는 삶이 아니라 축복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 돈 하며 세상 속으로 몰려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사소하기 그지없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로역정의 '허영의 시장'에서 신실을 잃어버린 그리스찬에게 '소망'이 새로운 동행자로 참여합니다. 새로운 소망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소망이 있을 때, 허영의 시장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바로 세상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다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름의 선택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신뢰하고 세상과 다름을 선택하는 용기있는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