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누가복음 2장 41절~47절]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 설교요약
어느 대주교가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장중한 문장들로 되어 있었고 늘 철저하게 잘 준비된 기도였습니다. 어느날 그는 기도 중에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평소 그는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정말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할 것이라고는 믿지 못한 채 기도 했기에, 갑작스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웰즈의 단편소설 [대주교의 죽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기도라는 행위에는 익숙했지만 정말 기도 응답이 있다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 아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내용입니다. 다 읽지 않더라도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말이 어떻게 될 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줄거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내재된 뜻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익숙한 말씀도 깊숙히 묵상하면 새로움이 보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절이 어느 때인지 누구나 때만 되면 압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와 기쁨을 온전히 알고 느끼지 못한 채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익숙해진 성탄절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왜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잊어버렸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될 때는...
1.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사람들의 축제가 될 때
유월절 명절을 맞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여자와 남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집으로 돌아가면서, 축제에서의 즐거웠던 추억들을 얘기하느라, 예수님이 잘 따라오는지를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은 가장 큰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절기의 의미대로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지만, 어느 사이엔가 예배 대신 축제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초심은 사라지고 행사만 남았습니다. 영어 성경이 이를 더 잘 나타냅니다.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For the feast of the passover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Feast는 축제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축제로 변질되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경건자에게는 예배의 때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즐길 것이 많은 축제의 때로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예전엔 크리스마스가 되면 예쁜 카드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카드를 쓰면서라도 예수님을 찬양하고 덕담을 적어서 보내며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을 통해 예쁜 카드 그림을 다운로드 받아서 보내는데 거기에는 찬양이나 덕담의 문구도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크리스마스 찬양도 생각해 보지 않고 날려 보냅니다. 우리의 성탄절도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즐기는 축제의 날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성탄절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찬수 목사님은 [붙들어주심] 중의 룻기 강해에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빵집이라는 뜻인데,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빵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오미 일가와, 오늘날 교회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어떻게든 살려고 빵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들 우리 교회에 빵이 있다고 허위 광고를 떠벌리지만 실제로 빵 없는 교회가 아닌지, 빵 만드는 법과 빵 굽는 오븐과 모든 재료는 다 갖추고 있지만, 정작 빵은 없는 교회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빵은 예배와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것은 여기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그냥 일상적인 삶의 일과로만 생각해서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코로나의 시기로 인해 영적으로 많이 피폐해 있습니다. 영이 살아야 육신도 삽니다. 유튜버를 열면 수많은 설교 말씀들이 쏱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튜버 말씀을 통해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생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2022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1월 1일부터 전교인 성경통독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경 통독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생수를 공급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영적 갈망이 활동으로 대치 되었을 때
41절부터 43절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과 '관례에 따라' 라는 문귀입니다. 이처럼 반복되어 일어난다는 것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영적 갈망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심은 사라지고 유월절 행사만 남아있었다, 또는 종교적 활동만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목회를 하는 사람 중에도, 설교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에서 주방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며, 예배 시간에 예배당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주방에서 주방일을 하면서 영상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다가 예수님을 놓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집사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그 분의 남편은 성도들로부터 신앙심이 좋다고 인정받았으며, 교회의 구역장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남편의 잦은 언어 폭력이나, 가족들에 대한 강압적인 모습,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닥달만 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신실하기 그지 없는 신앙인이었으며, 신앙서적들을 많이 탐독하여 신앙에 대한 지식도 박식했습니다. 그의 신앙의 모습은 간절한 영적 갈망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철저한 행위 중심의 믿음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주님 일을 한다고 자동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신앙이 관습이 되고 그 정신을 잃어버릴 때
42절에 '관례에 따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유월절 관습을 따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습을 꺼꾸로 말하면 습관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그들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가장 중요한 절기인데도, 어느 사이엔가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구촌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겪었던 얘기입니다. 찬양대 오케스트라에는 그냥 봉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수를 받고 알바처럼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다음 예배를 기다리는 중에, 졸기도 하고, 손톱소제도 하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젊은이를 보고는 좀 더 경건하게 다음 예배를 준비하면 좋겠다고 권면했다가 예상치도 않은 반응, "저 모태신앙이에요" 라는 반응을 듣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주일이면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습관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우리도 우리의 예배가 혹 교회 마당만 밟고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일 잘 하는 Worker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배 보는 자와 예배 드리는 자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배는 연극이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이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가 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보시며 받으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우이고 하나님 한 분만이 관객이다. 배우는 늦지 않고, 배우는 연극 중에 일찍 가는 법이 없고, 배우는 졸지 않으며, 배우는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한다"
언젠가 한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던 파일이 생각나서 다시 꺼집어 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한 집사님이 자신이 군생활을 할 때의 경험을 적어서 보내주었던 이야기입니다.
'신종플루가 극성을 부릴 때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해외에 체류했던 전력 때문에 입대를 하고서도 격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격리 대상자들이 격리되어 있던 곳에 어느날 중대장님이 찾아와서 격리 대상자들은 종교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라고 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표정이 굳어진 중대장은 정말로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만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몇 명의 병사들이 손을 내렸습니다. 중대장은 더욱 눈에 힘을 주고는 마지막으로 묻겠다면 그래도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결국 끝까지 손을 든 사람은 그 집사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포기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내어 주면서 그곳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막상 주일 오전이 되어 예배를 드리려니 나 자신이 참 초라해 보였습니다. 군대 입대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신병이 마스크를 낀 채, 생활복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손에는 포켓 성경 하나만 들려있었습니다. 중대장실은 참 허럼했습니다. 찬양팀도 없고, 설교자도 없고, 화려한 조명이나 시설, 심지어 성도의 교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심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눈물이 터지고, 내 안에서 말 할 수 없는 기운이 솟아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말씀을 읽고 ,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데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와 힘이 부어졌습니다. 군생활을 향한 막막함이 눈이 녹듯 사라졌습니다. 허럼한 중대장실이 주의 임재로 가득한 예배당이 되었고, 주님이 여건과 형편을 뒤덮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너무나 은혜로워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주님이 함께 하시고, 임재하심이 느껴지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직장인들은 일주일에, 주일 예배로 딱 한번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한 예배로 일주일을 견뎌내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시간의 예배가 정말 집중된 예배이어야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집중하고, 주님의 힘을 갈망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예배로 이 한 주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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