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11205_설교정리_반전의 하나님 (막5:21~24)

서정원 (JELOME) 2021. 12. 6. 13:21

○ 말씀전문

[마가복음 5장 21~24절]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 말씀요약

지난 11월에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해주셨던 조혜련 집사님. 44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부정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판해 왔던 조혜련 집사님이 45세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동안 되뇌었던 남묘호령계교 대신, 성경을 독파하고 Bible Woman이 되어 성경의 바람잡이가 되었다던 집사님,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던 그 집사님처럼 우리의 삶에도 반전의 역사가 있기를 갈망할 때가 많습니다. 건강을 잃고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업에 실패하여 좌절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 자녀 문제로 앞이 캄캄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내게도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갈망하게 됩니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한번 쯤은 갖게 되는 그 갈망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한 대표적인 한 사람을 오늘 본문 야이로를 통해 보게 됩니다. 자식이 죽으면 어머니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가슴이 아프고 저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도 딸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슴이 아리고 쓰렸던 그런 그에게 딸이 치유되고 다시 살아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럼 우리도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1.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남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씩씩한 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괜한 객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형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예상치 못한 문제와 아픔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어떤 장로님이 '이 자녀 때문에 이렇게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라며 엎어져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가 그랬습니다. 회당장이라면 유대 신앙공동체인 회당에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 세 명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질서를 유지하고 당일 성경 읽을 사람을 지정하기도 하는,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입니다. 늘 의연하고 한 곳도 허트러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죽었던 딸이 되살아나는 반전이 찾아왔습니다. 그 Key는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한 점 흐트러짐도 보여서는 안되는 회장당의 몸으로, 어린 딸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 발 아래 납짝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겸손함으로 간절함으로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이 겸손과 엎드림이 능력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숨김없이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제목을 내놓을 때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 살핌에는 간절함과 온전히 내어놓음이 없습니다. 간곡히 구하려면 있는 그대로를 솔직히 내어놓고, 완전히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반전의 하나님이 역사하는 계기가 됩니다. 

문제를 내가 가지면 내 문제로 남지만, 주님께 맡기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맡기는 것도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전을 갈망하도록 광야를 주시는 것도, 어쩌면 우리에게 겸손과 엎드림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2. 응답의 지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딸이 죽어간다며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곡히 간구하자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과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 사이에, 성경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한시가 급한 야이로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주셨으면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혈루증 여인을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시간에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을 때도 예수님은 담담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는 살려줄테니 걱정하지마라. 아직 늦지 않았다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길들일 때 시간으로 길들인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것은 이 시간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간을 이용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약속을 받은 것은 75세 때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기다리게 하시고 25년 후에야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기다리면 이삭, 기다리지 못하면 이스마엘

순종하면 이삭, 순종하지 못하면 이스마엘

믿으면 이삭, 믿지 못하면 이스마엘.

기다리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이스마엘처럼 평생 우리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말 신뢰한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말 믿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고 기다릴 때, 우리는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3.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이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이로에게 있어서 딸이 죽었다는 전갈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담담하게 "무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죽음과 삶은 별 차이가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죽음이란 예수님에게는 잠을 깨우는 문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암과 감기를 다르게 여기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대로 두느냐 낫게 하느냐와 같은 똑 같은 문제인 것입니다. 

스텐리 존스 선교사는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5시간이나 혼자 쓰러져 있다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지가 마비된 그는 의사 선생님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저를 볼 때마다 스텐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외쳐주십시오". 의사와 간호사는 웃으면서도 그를 만나면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지 6개월이 될 즈음에 존스는 당당히 걸어서 나갔다고 합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우스게 소리처럼 여겼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에게 들어간 예수님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달리다굼은 반전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 어떤 절망, 좌절, 낙심이 찾아오더라도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이 되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Don't listen to them, just trust me"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저 말 믿지말고 내가 하는 내 말만 믿어라' 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이신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반전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