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1110_설교정리_인생은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 (왕하5:1~3)

서정원 (JELOME) 2024. 11. 10. 13:08

○ 말씀 전문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 받은 말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한사람이 온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고스란히 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Blessing Day를 맞아 오늘 우리 교회를 찾아주신 한분 한분의 발걸음도 그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바꾸어줄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하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금의 시리아인,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러 가게 되는 배경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의 뜻은 '기쁨과 즐거움' 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이름과는 달리 정작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아만이 어떤 자세로 엘리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러 이곳에 온 우리도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신앙의 렛슨은 ...

 

1. 인생에는 누구나 자신만의 아픔의 스토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부부를 보면서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한번 살아보시죠' 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달콤해 보이는 부부 생활 뒤에도 남이 모르는 아픔이 한두개는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아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기에는 화려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큰 용사'입니다. 그리고 '아람 왕의 군대장관'입니다. 큰 용사로서 왕으로부터 돈독한 신임을 받는 국방부 장관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남다른 아픔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병환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종을 통해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병을 고칠 수 있는 선지자가 사마리아에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늘 무거운 마음으로 살가던 그에게는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소식에 소망을 두고 그 선지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나병을 벗고 기쁜 인생을 살게 된 데는 두 가지 주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하고 결단한 용기입니다. 둘째는 생각지도 못한 루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소녀와 같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 경영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암이라는 큰 병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에게도 자녀가 없어서 고민인 사람도 있습니다.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명적인 아픔을 하나둘 쯤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아픔에 굴복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 그리고 오늘 이 자리로 자신을 인도해 온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집니다. 나아만에게도 이런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전에 임했습니다. 1절입니다.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우리가 오늘 여기에 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발맞추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그 예수님을 통해 아픔이 해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이 필요한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선지자 이사야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면 주려고 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5절입니다.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 보면 은 3억원어치, 금 60억원어치를 준비했습니다.

이 준비한 내용을 해석해 보면, 첫째는 이런 엄청난 재물을 준비한 것을 보면 아마도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많은 재물을 갖다 주면 그가 주눅이 들어서라도 병을 고쳐주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심중에는 여전히, 돈이면 되지 않겠냐? 권력이면 통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어떻게 대했을까요? 바로 냉대였습니다. 그가 왔다는 전언에도 얼굴도 내밀지 않고 하인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돈도 통하지 않고, 권세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엘리사는 그런 나아만의 행동에 빈정이 상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꼭 필요한 점을 터치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겸손과 겸허함으로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우리가 가진 권력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방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우리가 가진 남다른 아픔을 치유받기 위해서는, 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창조주 앞에 겸손하고 겸허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3. 병거에서 내려와 자신이 입은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자신의 방문에도 문도 열어보지 않고 하인을 시켜 지시를 하는 엘리사에게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는 물로 씻을 것이면 더러운 요단강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깨끗한 호숫물로 씻는게 낫다고 생각하며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결정적으로 깨어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아와 자존심입니다. 이것을 버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화가나서 돌아가던 나아만은 늦게 나마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요단강 가에서 타고 있던 병거에서 내렸습니가. 자기의 권위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가리고 있던 갑옷을 벗었습니다. 그가 수치스럽게 여겼던 나병을 부하들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가진 아픔을 극복하려면 우리의 명예, 부끄러움, 자아, 자존심을 완전히 벗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 배경에는 어쩌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엘리사의 요구가 너무 쉬웠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방법으로 요구를 했다면 어쩌면 체면도 살릴 수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하라는 것이 강에 들어가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때, 하나님은 대수술을 하거나, 큰 돈을 헌금하라는 등, 어려운 방법을 요구하지 않고, 단순한 방법으로 접근해 올 수 있습니다. 하찮은 방법이라 생각될지라도 불신하지 말고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기로 결단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자신을 불쾌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일지라도 병거에서 내려오고, 갑옷을 벗고, 그 아픈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리십시오. 그것이 내가 가진 아픔을 깨끗이 치유하는 첩경입니다. 14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이 은혜가 임하는 새로운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