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전문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받은 말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떠오른 찬양입니다. 설경욱 목사님의 '그 사랑 얼마나'입니다.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나를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나를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이 찬양을 부르면서 그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의 감사와 감격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 감격을 '즐거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장 2절과 3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또한 11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은 자기의 신앙 상황이 항상 좋았기 때문에 즐거워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신체적 결함도 삶의 고초도 늘 함께 따라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늘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바울이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1.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잘 표현해 준 찬양 중에 '나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예랑워십이 부른 이 찬양에는 무려 470만명의 뷰를 찍었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려 내가 왔노라
주의 사랑
이 사랑은 결코 변치 않아
모든 계절 돌보시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신실해
실수가 없으신 주만 바라라
주님의 나라와 뜻이
나의 삶 속에 임하시며
주님 알기를 주만 보기를 소망해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렴 없는 믿음 주실
나의 하나님 완전한 사랑 찬양해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오늘 본문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스러울 때도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경건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척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품어주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우리 사랑도 이처럼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어린 시절 하나님 앞의 내 모습은 자존심만 크고 자존감은 낮은 모습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단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우스게 소리로 육두품이 있다고들 합니다. 양가가 다 믿는 집안이면 성골이라 부르고, 한쪽만 믿으면 진골이라 합니다. 아버지가 장로이면 더 낫고.... 그런 저는 마치 백정에 가깝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오고서는 삐뚤어진 내 자화상을 보곤 했습니다.
그런 저를 붙잡고 변하게 해 준 귀한 말씀이 스바냐 3장 17절이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의 모습,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모습만 있는 건 아닐텐데도,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할 텐데도,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게 된 데에는,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기억한다면 어찌 우리의 삶이 즐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감격을 누리는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연약할 때는 '부족할 때', '미 성숙할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을 때도, 바울이 간질과 안질이라는 질병자였음에도,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성격의 결함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품어주시고, 그들의 삶이 거기까지 가도록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게도 그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내 딴에는 합리적이지 않고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싶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가 있었습니다. 사역 초창기에 일일이 간섭하시는 담임목사님의 사모님과 다투고 사임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에 사모님을 뵙고 사과를 드리기는 했지만,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찬양사역자인 주향기님의 '고슴도치를 사랑한 예수님'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고슴도치는 가시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지요. 이 가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찔렀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은혜 안돼는 인생이 바로 저였습니다. 질투심도 강했고 다혈질에 의심많고 쉽게 흔들리는 나의 약한 모습들... 이것들 모두가 저의 날카로운 가시들이었습니다."
이를 깨닫고 밤새도록 울다가 쓴 가사라고 합니다. "누구나 고슴도치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고슴도치일겁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도 여전히 우리를 안아주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찬양합니다. 우리가 고슴도치일지라도 안아주시는 그 사랑을 알기에 이 가시를 길들이는 그날까지 하나님 찬양 할려고요. 진짜 온세상이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어도, 신앙이 미숙한 상태에서 헤매고 있어도, 내 욕심에 빠져 살고 있어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3. 우리가 아무 쓸모가 없으 때에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인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되었습니다.
메시지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진철 목사님은 '죄를 지은 것만이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준다고 여기면 죄인같은 마음이 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용돈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죄인이 된 것 같이 느끼게 됩니다. 쓸모가 없으면 죄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양정철 목사님에게는 중증 장애인 동생이 있었습니다. 시설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정말 중증 중의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시설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동생,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동생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원리의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무 효용가치가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버리시지 못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육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새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고, 학교에서도 이름 한번 제대로 불려주지 않는 소외감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그런 나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은 나를 안아주시고 얘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이 분이 전하는 예수님이라면, 이 분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믿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십자가의 강도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6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6시간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골든 타임이었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마리에게 감사의 인사도 할 수 있었을 테고, 변함없이 따라주고 지켜주러 온 요한에게 감사 인사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하만물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생떼같은 골든 타임을 곁에 있는 강도에게 사용하셨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전 믿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페이지처치의 신재웅 목사님의 "구겨진 종이에도 최고의 이야기를 쓰시는 하나님"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쓰시는 분입니다.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판에
거룩한 십계명을 쓰셨고
꾸깃한 파피루스에 율법을 쓰게 하셨고
예언을 쓰게 하셨고 말씀을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겨진 삶에도
최고의 이야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구겨짐에서
최고의 이야기가 나왔고
실패로 구겨진 베드로의 삶에서
최고의 제자의 이야기가 쓰였습니다.
그동안 나는 구겨진 삶을 살았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보폭 큰 내면의 방황
여전한 사춘기로 힘겨운 20대와 30대를 보냈습니다.
평안함이 구겨져 불안함이 되었고
온유함이 구겨져 냉철함이 되었고
평화가 구겨져 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겨진 종이 같은 삶에서
늘 최고의 이야기를 쓰셨습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셨고
하나님께 엎드려 모든 것을 맡길 때마다
예비하신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담겨있는 이야기가 최고라면
그겨진 종이여도 그 책은 가치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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