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1020_설교정리_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롬 4:20~24)

서정원 (JELOME) 2024. 10. 20. 17:16

○ 말씀 전문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받은 말씀

어떤 믿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딛어 낭떨어지 절벽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절벽 중간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잡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를 쳐다 보며 외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나요? 도와주세요", 그러자 절벽 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하나님이다. 내가 도와주마. 잡고 있는 그 소나무를 놓아라" 그 소리를 들은 그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외쳤습니다. "여보세요. 그 위에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 없으세요. 도와주세요"

오늘 말씀은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서는 이미 로마서 1장 17절에서 봤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은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했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볼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입니다.

4장 18절과 19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바랄 수 없는 상태란 영어로 Everything was hopeless 입니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내인 사라도 코웃음을 쳤습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정말 아브라함에게는 '바랄 수 없는 중'이었습니다. 그럴 때 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럼 이런 믿음은 언제 생겨날까요? 한계의 벽에 부딪혔을 때 생겨납니다. 인간에게는 영과 혼이 있습니다. 혼의 핵심은 이해와 해석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혼을 많이 쓰게 되면 영이 침체되어 낙심과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영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이 영이 지배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성경 구절이 바로 불뱀과 놋뱀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는 뱀에 물리는 사고가 종종 일어닙니다. 독사에 물리면 물린 곳이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붓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고 합니다.

광야를 유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고 이런 고통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불뱀에게 물려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며 낫게 될 것이라고, 믿음을 가진 자는 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들 황당한 소리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과 15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역시 지금도, '저 십자가 바라본다고 살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성경에서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부부에게도 소망이 있겠다, 내 자녀에게도 소망이 있겠다, 내 일터에도 소망이 있겠다고 바라는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앞이 캄캄한 중에도,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절망 앞에서도,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바라보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 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언제 주어질까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을 때 주어집니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열리고 하나님의 터치가 있을 때 주어집니다. 창세기 15장 1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 5절에서 말씀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00세가 다 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아브라함은 굳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1절부터 22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이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붙들고 산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하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받은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말씀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잡고 걸어가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무작정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잊혀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말씀을 듣고 말씀이 참 좋다 하면서도 이내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억지로 기억해 내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꾸만 그 말씀이 생각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믿어야지 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믿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믿어지고 고백하게 됩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믿어지는 것은 그것으로 끝남을 경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개척을 시작했을 때도 개척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있었고, 코로나 시기 속에서도, 교회 건축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개척도 성공했고, 교회 건축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이 축복입니다. 그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죽은 자도 능히 살릴 것이라는 믿음' 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은 보이지 않지만, 성경에서 믿음의 장이라는 히브리서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배경에 해당되는 성경 말씀이 창세기 22장 5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온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이삭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한 말이 바로 이 5절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We will worship and we will come back to you.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혼자 돌아올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둘이 (we)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반드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흉내만 내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22장 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진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하자 하나님의 사자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두번 연거푸 부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흉내만 내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거기에는 약속으로 주셨던 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든 살리실 것임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믿음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 앞에서도 믿는 것, 죽은 자도 능히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 목사님은 한 젊은이의 간청을 받았습니다. 그 청년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도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가 목사님을 찾아온 것은 그의 어머니가 루게릭병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의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자기의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는데, 정말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으실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답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들 10여명과 함께 그 아들을 따라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어머니가 분명히 천국에 가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 천국에 가실 확신이 있으시면 오른손을 들어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차 싶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 뱉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황해 하고 있는 목사님 눈앞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런 의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오른손을 드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잘못 본 것인가 싶어서 다시 한번 외쳤습니다. "어머니, 천국에 가실 확신이 있으시면 한번 더 오른손을 들어주십시요" 그러자 이번에도 그 어머니가 오른손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 청년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은 이런 것입니다. 왜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냥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것을 다 이해하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에는 혼적 믿음과 영적 믿음이 있습니다. 혼적 믿음은 머리로 계산하고, 생각해서 이해될 때 믿는 것입니다. 왜를 묻습니다. 답이 없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영적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임자하심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한 글귀를 보고 아! 맞다 싶었던 글귀가 있어서 소개를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할 때 그때 만들어진다. 다 이해되는 상황을 통과할 때는 혼만 커지지 믿음의 영은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통과할 때는 어떤가? 혼의 생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신싱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내 안에서 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언제 영적인 권위가 부어지는지 아는가? 영적인 권위가 부어지는 것에는 원리가 있다. 바로 억울한 일을 묵묵히 통과할 때다. 억울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 이 상황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불평없이 아무 원망없이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심을 의지할 때다.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할 때, 위로부터 권위가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