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929_설교정리_나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사는가 (롬2:1~2)

서정원 (JELOME) 2024. 9. 29. 21:49

○ 말씀 전문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 받은 말씀

미국의 존 비비어 목사가 쓴 ‘무엇이 선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설교자였던 짐 베이커 목사는 언제부터인가부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간통죄와 사기죄를 저질러 감옥에 있을 때, 비비어 목사가 그를 면회했을 때의 이야기라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비어 목사는 수감된 그 목사에게 “언제부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나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난 그런 적 없어요” 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비비어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죄를 짖고 감옥까지 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비비어 목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존, 나는 그 일을 겪는 동안 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까? 심지어 목회자들이라도 진정으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또한 나는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목회를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의 Key Ward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혹은 국내에 있으면서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남북한이 서로 대치하는 상태에서 언제든 전쟁이 터질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의 의아한 질문을 받게 될 때, 전쟁이라는 것이 그냥 개념 상으로만 우리 머릿속에 있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혹시 그처럼 개념 상으로 인지만 하고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그 심판의 무서움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찾아올 심판은 어떤 심판인지, 어떤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신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

 

1. 하나님은 '진리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진리대로 심판한다는 의미는 ① 말씀대로, 성경대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② 거짓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즉 의로움의 잣대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③ 현상의 기초가 되는 저변의 실체, 즉 인간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실체를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실상은 이방인에 비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말씀은 유대인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에 비해 깨끗한 모습으로 경건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바울은 왜 이 말을 하고 있을까요?

유대인일지라도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이 아니라, 삶의 저변에 있는 실상, 저번의 실체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고 해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저변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음욕의 숨은 동기가 남아 있으면, 성에 대한 도착과 집착이 있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실체를 보고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의 실체를 꿰똟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과 18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내 영혼의 밑바닥까지 점검하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6절부터 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마태복음 23장 2절부터 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모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남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를 듣는다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신앙이 쌓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산 만큼만 신앙이 만들어집니다. 말씀을 실천한 삶이 내 신앙의 열매입니다. 

목회자로서 자기가 한 설교 말씀에 대해, 어떤 목회자는 '설교는 설교일 뿐이지 어떻게 설교한 대로 사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설교는 설교이지 어떻게 설교 한 대로 사나?' 하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하는 메시지와 삶에 간극이 있으면 그것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생각하고, 말씀대로 사는 몸부림이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그리고 전도서 12장 1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바리새인들에게는 또다른 약점이 있습니다. 외식입니다. 행함이 있지만 그 안에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이것도'는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저것도'는 '율법을 지키는 마음'입니다. 행동과 마음이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문제는 바로 '은밀한 것',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행위 만이 아니라, 행동을 했더라도 그 은밀한 마음, 마음의 중심까지 보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본교에서 사역할 때, 어떤 직장의 신우회를 도와주던 일이 있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신우회에 참석하여 그들의 예배를 위해 섬겼습니다. 교회에서 제법 먼 곳에 있는 회사였기에 신우회에서 당일 기름 값으로 15만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우회 회장님이 제게, 좀 더 자주 신우회를 갖고 싶어서 그런다며 혹시 한달이 두 번 와주실 수 없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마고 승락을 하던 그 찰나에 제 머릿속에 갑자가 두 번이면 기름값이 15x2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회장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런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을 훓고 지나가는 하나님의 눈길을 느끼고는 숨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얼마전 목회자 세미나 겸 총회가 있어서 참석을 했었는데, 총회 중에 이권다툼으로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머리도 식힐 겸 잠시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집사님으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왔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떻게 섬겨야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메시지를 받는 순간 아팠던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목회자들 마져 자기 이익을 향해 아등바등 하는 시대, 그래도 그 집사님 같은 분이 계심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는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자가 더 큰 복을 받음을 기억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한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