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전문
[로마서 2장 28~29절]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받은 말씀
카일 아이들만의 책 '팬인가 제자인가' 에서는, 팬은 자기가 좋아하는 경기나 선수가 나오면 얼굴에 붉는 색칠까지 하고 경기장으로 하서 열렬히 응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경기에 나서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팬의 한계입니다. 그럼 제자라고 자칭하는 크리스찬들은 어떤가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크리스천 중에도 팬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고 떠벌리지만 정작 스스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늘 본문 28절은 무늬만 유대인이지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고 폄하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신앙이 관습이 되고 그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티벳의 사원에 가면, 불교경전을 넣은 깡통같이 생긴 마니테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 경전을 읽는 대신 이 마니테를 돌리고는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번 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텐데, 갈수록 게을러지고 형식적인 흉내만 내게 된 것이라 봅니다. 그것이 관습으로 고착화 되어 이젠 더 이상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마니테와 같은 모습이 유대인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의 진정한 정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기는 7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형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질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질은 그때의 유대인에게만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모교에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봉사자들도 유급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찬송할 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아르바이트 쯤으로 여기는 봉사자들도 있었습니다. 찬송 시간이 끝나자마자 카페로 몰려가 손톱소제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젊은이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너흰 예배 안 드리니? 하고 물었더니 대뜸, "드려요. 저 모태신앙이예요" 하는 사람도 있고 "저 유아세례도 받았어요"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이 그들의 자랑이고, 유아세례 받은 것이 무슨 훈장이나 받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사나 장로 직분 받은 것을 무슨 개급장이나 단 것처름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태신앙, 직분,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 대한 마음, 예배를 드리는 정신, 온전한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겼다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도 이런 형식적인 모습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사야 1장 11절과 12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의 시대에도, 바울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짝퉁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 짝퉁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사역은 프로 정신으로, 하지만 신앙과 예배만큼은 아마추어 정신으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짝퉁 목회자가 되지 않으려는 제 나름의 몸부림입니다. 성경에 '새 노래로 여호와를 노래하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란 신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맞아하는 이 한주는 정말 마음이 새롭게 되는 예배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영적 갈망이 활동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그치게 되는데는 신앙이 관습이 되고 그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는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있습니다. 내가 한 행위와 행동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릴 때도 명목상 그리스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바라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자가 되지 말고 세리와 같은 자라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없고 세리에겐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한 이유를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들은 자기의 신앙의 행위로 할 몫을 다했다고 여겼습니다. 신앙을 그들의 행위로 대치한 것입니다.
반면 세리의 모습을 누가복음 18장 13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들은 여전히 영적 갈망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행위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이 바로 이 세리의 모습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변질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로마서 2장 1절에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점검하고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바쁘다고 질책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떠나가면 자꾸 다른 사람들의 모습만 보입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내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내 삶이 신앙에 미치지 못함을 바라보고 영적인 갈망으로 살아갑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봉사와 같은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그 주님 자체를 놓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찾았을 때, 마르다는 주님에게 무엇으로 대접할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언니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도 주님 곁에 앉아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뜻 마르다가 올바르게 산다고 여깁니다. 일터에서나 교회 봉사에서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선적인 것은 주님입니다. 일터에서 또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시되, 그렇다고 그로 인해 주님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결코 행위가 영적 갈망을 대치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또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3. 타인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을 탄다고 여겼습니다. 시체를 만지게 되면 최소한 일주일은 회당에 나가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을 만지지 않기 위해 무덤 위에 회칠을 했습니다. 하지만 회칠로 인해 밖으로는 깨끗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있는 시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포장을 중시하는데 그치고 내실을 깨끗게 하는 것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고도 시체를 만지지 않았으니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삶의 태도는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하자 그들의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로 자꾸만 모아져 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쳐내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명목상의 그리스찬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한계가 바로 이렇게 남의 흠을 찾아내서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내게 직업병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꾸만 남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게 7년 간의 개척교회 삶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게 가장 힘들고, 내게서 개선해야 할 점은 바로 '제 자신을 위한 목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자신부터 제대로 믿게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바라보고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내 자신의 신앙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세아 10장 12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명목상의 크리스찬이 되면 우리의 마음은 묵은 땅처럼 딱딱하게 됩니다. 그 묵은 땅을 기경하려면 쟁기로 갈아 엎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묵은 마음을 다시 갈아 엎어야 합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노인팅 기도회가 진행되면서 하나님이 부흥에 대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 교회로 이전하고 더 많은 성도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잘 부흥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답하였더니, 하나님은 그것은 성장이지 부흥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하나님의 마음이 교회에 부어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느냐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도의 소원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우리에게 신앙의 전성기를 주옵소서.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묵은 땅을 기경하는 신앙의 전성기를 주옵소서.
처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 밭이 가장 뜨겁습니다. 갈수록 매너리즘의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묵은 땅이 되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명목뿐인 신앙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여, 다시 한번 신앙의 전성기를 이루어, 명목상이 아닌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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