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505_설교정리_총론보다 각론이 강한 사람이 되라 (약2:1~4)

서정원 (JELOME) 2024. 5. 5. 11:46

○ 말씀 전문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받은 말씀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옥한흠 목사님이 제자훈련 시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님은 '한국교회는 총론에는 강한데 각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은혜와 구원과 성령충만과 사역과 같은 총론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또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만 실제로 성령충만한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같은 디테일에 대해서는 악한 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문득 일본 목회자와 한국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일본 목회자들은 말씀에 대한 테이프를 닳고 닳을 정도로 듣고 또 듣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목회자들은 한번 들으면 마치 다 알고, 그 주제에 대해 이미 통달해버린 것처럼 여깁니다. 이러다 보니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각론에 대해 약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총론과 함께 그 총론에 따르는 각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은 분노조절과 경건성에 관한, 어쩌면 총론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와 같은 총론 보다는 차별의 문제와 같은 각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1절 "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믿음을 가졌으니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즉 믿음을 가진 삶의 첫번째 각론으로 차별을 들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는 자들이 왜 차별하는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이 우리를 차별없이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차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개역판이 제겐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개역판 1절입니다.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직업이나 부와 권력,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한 호텔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안내자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한 장로님의 차에 동성하여 같은 호텔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달려와서 인사를 하고는 문까지 열어주었습니다. 그 때 타고 간 차가 좋은 외제차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농담삼아 얘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비싼 외제차를 타는 것은 승차감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차감이 좋아서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단 호텔 안내원 뿐만 아니라 내 모습은 어떤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차별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사실은 성경을 통해 수없이 마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부분은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십자가에서 강도와 나누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중한 6시간 중에 강도와 나눈 시간은 어쩌면 우리가 볼 때 낭비하고 허비한 대화의 시간처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소중한 시간에도 그를 차별없이 대해주셨습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막내로 태어나 자란 난 꾀죄죄 하고 냄새나는 아이였습니다. 당시 시골 아이들은 일년에 년중 행사로 그믐날 목욕을 하는 시절이었으니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그런 나를 한번도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날 꼭 껴안아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는 저 주일학교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라면 끝까지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편견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내가 홀로 남겨져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주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우리는 하나다' 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속으로 한 발 더 깊숙히 발을 들여놓고 바라보면 그 속에도 차별이 만연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다' 라고 부르짖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지키려는 각론의 노력이 더욱 절실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를 힘써 지키는 것이 복음의 각론임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그러셨듯 우리에게도 차별하지 않는 삶을 사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주님은 우리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자기 야망과 이익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릅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보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는 '죄인 되었을 때'로 표현하고 있으나 메시지 성경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을 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긴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을 찾지는 않습니다. 목적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 시점에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을 택해 믿음으로 부요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내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삼을 때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은 굳이 뚜렷한 수단으로 삼지 않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시하고 차별하는 삶을 살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다] 라는 광고에서 보면, 알바생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손님 중에서 어떤 손님을 만날 때 감사하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무려 42%에 해당하는 알바생들이 '인사에 대답을 해 줄 때' 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사소한 것에 감사한다는 것이지요.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입니다. 마트에서 일하든지 식당에서 일하든지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알바생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친절하게 인사에 답해주는지, 인상을 쓰고 대하지는 않는지 한번 쯤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람을 예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는 목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대해야 할 지 그 각론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선배 목사님의 말씀에서 감동을 받고 또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의 핵심은

중요한 사람은 중요하게 대하라

특별한 사람은 특별하게 대하라

소외된 사람은 소중하게 대하라

민감한 사람은 세심하게 대하라 였습니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을 중요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실망하게 만듭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쉽게 대하면 그 사람을 실망하게 만듭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을 하는 당사자를 그날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실망하게 만듭니다.

소외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주면 그 사람이 마음을 열게 만듭니다. 민감한 사람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이 임하게 됩니다. 

단순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을 쓰고 배려해 주어야 할 이러한 점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각론으로 행하는 복된 삶이 됩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의 부르심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과 9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을 요한일서 3장 1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믿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3장 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제자라 하는 것이 아니라, QT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제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 목적이 사랑에 있습니다. 날 사랑하시려고, 내게 주신 사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차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날 부르신 이유가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여 차별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예수님의 사랑]에 나오는 한 이야기입니다. 기구한 사연으로 창녀촌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창녀촌에서 생활하던 그 자매가 그곳에서 한 청년을 만나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탈출하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곳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평소 꿈꾸던 삶은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에 가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하여 교회에 등록을 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모범적인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집사 직분까지 받고 행복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같이 섬기는 한 집사님이 우연히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전했고 교회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성도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 부부도 점차 그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이 노력하고 애를 썼지만 사람들의 눈빛과 서선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곳이 창녀촌의 동료들 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느꼈고, 결국 수면제를 복용하고 부부가 죽음을 택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교회라면 그들을 잘 품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들도 따뜻하게 품고 갈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각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은혜, 성령충만, 구원, 전도, 사역.... 신앙생활에서 이 같은 총론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려면 실제 삶을 통해 어떻게 헌신하고 섬길 것인가 하는 각론도 중요합니다. 각론을 놓치지 않아 진정 살아있는 신앙 생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