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40428_설교정리_분노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 (약1:19~21)

서정원 (JELOME) 2024. 4. 29. 08:19

○ 말씀 전문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 받은 말씀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도 좋아한다.

미숙한 사람은 인연도 악연으로 만들고,
성숙한 사람은 악연도 인연으로 만든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산다.

미숙한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바람과 물결이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에
선다고 믿으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미숙한 사람은 좋고 싫고를 따지지만,
성숙한 사람은 옳고 그르고를 선택한다.

미숙한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큰 불행도 망원경으로 들여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미래를 내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특별한 일들에만 관심이 있지만,
성숙한 사람은 평범하고 작은 일에서 더 많이 배운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까지를 살필 줄 안다.

미숙한 사람은 구름만 쳐다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바라본다.

미숙한 사람은 세상이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데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

미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웃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우리는 작년 보다는 올해, 지난 달 보다는 이번 달, 어제 보다는 오늘 더 성숙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음을 발견하곤 때론 실망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하면 성장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가르쳐 줍니다. 야고보서의 큰 주제는 '행함'이지만 행함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성숙'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서두에 이 '성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온전'이라는 단어를 '성숙'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됩니다. 이는 3장 2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도 굴레 씌우리라"

그럼 우리가 성장과 성숙을 위해 붙들어야 할 것을, 본문은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실까요...

 

1. 분노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

참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성숙하지 못하다고 자괴하는 경우의 대표적인 모습이 순간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 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성숙한 자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지 충고해 줍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소위 '경청'을 말합니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부모는 상대방이나 자녀의 감정까지도 이해하려고 깊이 들어줍니다. 이를 공감적 경청이라고 합니다. 분노는 다 들어보지도 않고 서둘러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말을 차단하고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조절이 되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 중에 '우리 엄마는 맞는 말도 기분 나쁘게 한다'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의로운 분노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성경은 금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과 27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라고 합니다. 틈을 탄다는 말은 foothold라고 표현합니다. '발을 디딜 곳'을 말합니다. 분노가 사단이 침범할 발디딜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 가정을 파괴하려고 노리는 사단의 발 디딤돌이 됩니다. 이 디딤돌인 분노를 타고 우리 가정을 침범해 들어오고, 내 일터로 파고 들고 내 인격을 파괴하고 주저앉히려 파고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분노와 감정을 잘 조절하여야 합니다. 분노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경청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조직 책임자로 있을 때 기도하고 회의에 참석하면 훨씬 원활하고 부드러운 회의가 됨을 깊이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분노가 조절될 때 우리 가정을 살리게 됩니다. 성숙한 가장으로 존경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

예배에 참여해서 즐겁게 찬양하고 목사님이 전하는 설교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내 삶을 향해 주시는 황금 같은 은혜의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느꼈던 것은 설교말씀이 세상에서 돈주고 듣는,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세미나와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하는 교훈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교 말씀은 하루만 지나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듣는 그때만 유익하고 좋았던 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으로 삶이 성숙해 가고, 믿음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받은 말씀이 내 삶의 성숙을 가져오려면 말씀을 받는 자세부터 달라야 합니다. 말씀은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합니다. humbly accept로 포현합니다. humbly는 '겸허하게', '황송하게'라는 뜻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듣는 세미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듣고 행해야 하는 황송그러운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금광석 1ton에서 단지 5g의 금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유투브를 통해 많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많이 듣는 것도 좋지만 들은 말씀을 부둥켜 안고 행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돌 무더기가 아니라 금이 들어있는 금광석을 켜고 그 금광석을 통해 순금을 뽑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2절에서는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고 그치는 사람을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듣고 행함의 실체가 없는 사람은 들은 것으로 자신이 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23절부터 25절은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행함이 없음은 거울을 보고 화장이 잘 되었나 살피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는 이내 잊어버리는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강의실용 신앙과 실험실용 신앙으로 구분짖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의실용 신앙은 '기도하면 된데'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는 힘이 없는 기도입니다. 반면에 실험실용 신앙은 '기도하면 돼'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 같은 신앙이 힘이 있고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우리는 무 씨와 배추 씨를 보고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 씨와 배추씨를 한 눈에 보고 아십니다. 그것은 심고 거두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설교 말씀도 들을 때만 아멘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삶을 통해 실천 해 봐야 그 말씀의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내 삶을 위한 레마의 말씀이 되고 믿음이 성숙해지고 성품이 성숙해집니다.

 

3.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을 사모하라

성숙하지 못한 모습 중의 하나는 촐랑거리는 모습입니다. 세상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삶에 진중함이 없고 삶에 대한 경건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적 경건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26절과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가 말하는 경건은

첫째, 말조심입니다. 언어가 통제되지 않는 신앙은 헛된 경건이라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그 동안 쌓았던 신뢰를 다 까먹게 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애정과 사랑이 말 한마디로 무너지게 됩니다. 직장에서 보여온 인품이 상스러운 말 한 마디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조심을 경건의 요소로 여겨서 중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이 성장과 성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됨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섬김입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며 사는 것은 올바른 경건이 아닙니다. 교만한 삶입니다. 교만은 결코 경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수직적 관계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수평적 관계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셋째, 가치기준입니다. 세속에 물들어 흔들리지 않고 가치 기준을 지키는 삶이 경건한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뉴스와 세상적 가치관에 노출되어 자기 가치, 신앙의 가치가 흔들리며 삽니다. 성경적 기준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경건한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서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아이를 양육하려고 합니다. 경건한 삶은 가치관을 굳건히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들 가는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을 가서는 안됩니다. 다들 한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면 안됩니다. 가치관을 붙잡고 그 가치에 따라 가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만 진정한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다가 간 분으로 서서평 선교사님이 생각납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입니다. 자신의 급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나라 이름을 지을 때 ‘천천히’라는 의미의 ‘서(徐)’와 평평할 평(平)를 성과 이름에 넣었습니다. 천천히 평평하게 선교하겠다는 의지가 보여지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아버지가 호적에 없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납니다. 더구나 그녀가 3세일 때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 가버립니다. 9세에 할머니를 잃은 후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건너 갑니다. 

다행히 가톨릭미션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뉴욕시립병원 실습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개종이라고 하지만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건너 온 셈입니다. 

그녀는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는 한국 선교를 지망합니다. 그리고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를 통해 간호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습니다.
그녀는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사역합니다.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초창기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그녀는 조랑말을 타고 자주 전국을 순회하며 한센병 환자를 포함해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고 다녔으며,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큰 년’, ‘작은 년’, ‘지리산 댁’ 등으로 불리던 수백 명의 여성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순회할 때마다 온몸에 들러붙은 이를 잡느라 밤을 지새우는 것이 그녀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서서평으로 살며 한국 간호학계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는데, 당시 조선의 보건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녀는 광주 제중병원을 중심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수양딸 13명과 나환자 아들 1명 등 14명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기도 했습니다.
한센인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살던 그녀는 정작 자신은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돕기 위해 자신의 생활비마저 쪼개어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22년의 세월을 조선에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말했습니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그대로 못 본 척 할 수 없으며 옷장에 옷을 넣어놓고서 당장 추위에 떠는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는데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고 그녀는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쉐핑이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체를 해부해 연구 자료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죽자 천여 명에 달하는 장례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라 부르며 함께 했습니다. 푸른 눈을 가졌지만 수많은 조선 사람들의 어머니로 살다 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 주님을 따라 우리도 온전한 섬김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인생을 살도록 결단하며 이 한 주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