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말씀요약
아르헨티나에,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다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어떻게든 그것들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서 빚을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옆집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TV를 가져오면서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했습니다. 당시는 각 가정에 TV가 보급되는 일이 더물었고 수신 신호가 약해서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 여인은 그때부터 온통 TV를 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을에 살던 다른 집들도 점차 TV를 들이고 지붕에 안테나를 설치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더욱 더 TV를 사야겠다는 마음이 짙어졌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시장에 나가서 안테나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지붕에 안테나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TV는 구매하지 못했습니다. 쓸데없는 안테나를 사는데만 돈을 투자했습니다.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무엇으로 가득차 있어야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주신 말씀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득 품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삶입니다.
7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겸손과 낮아짐이라는 비움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이 비움이 예수님의 가장 첫번째 정신이셨습니다. 지정학적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버리시고 가장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침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요단강은 지정학적으로 호수보다도 낮은, 가장 낮은 곳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바로 이 비움의 마음입니다. 비움을 통한 겸손입니다. 이 겸손함이 마음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새에 대해서도 전문가셨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약 9,000여 종의 새가 있는데, 목사님은 2,500여 종의 새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를 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쓴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는 책을 통해, 새가 날 수 있는 것은 뼛속까지 비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정교한 비행기 일지라도 자연스럽고 능숙한 새의 비행에 비하면 얼마나 엉성한가? 새들은 기어 오를 수 있고, 숫아오르며 활강 할 수 있고, 날개를 퍼득거릴 수 있으며, 선회와 회전과 다이빙이 가능하다. 이러한 비행은 속이 빈 뼈로 이루어진 가벼운 골격, 튼튼한 흉곽, 유선형의 몸매, 그리고 모든 깃털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유연한 날개와 환상적인 결합으로 인해 가능하다. 그렇지만 결국 새가 날 수 있는 이유는 뼈 속까지 비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맞이하는 이 성탄에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비움의 영성 말입니다.그렇다면 우리가 이 성탄에만 이것을 깨닫고 구하면 될까요? 이 성탄에 그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은 비움의 영성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불행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 잘 난 채 하고 싶은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성을 유지하려고 날마다 노력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단지 그것을 깨닫는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비움의 마음을 품으려면 '날마다'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마음이 비움의 삶이 됩니다.
2. 섬김 (서번트 리더십)의 삶입니다.
7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 중에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7절을 쉬운성경을 통해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땅으로 오신 것도 낮아짐이셨지만 그 공생애의 사신 모습도 철저한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더불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은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동방순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서번트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줍니다. 순례단 속에 '레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순례단원들의 식사를 돕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순례단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순조롭던 순례가 삐거덕대기 시작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순례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꺠닫게 됩니다. 순례단에서 중요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레오'였구나 함을 깨달았습니다. 알고보니 레오는 잔심부름꾼이 아니라 최고위층에 있던 리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이 서번트 리더십이 우리가 배워야 할 마음이요 삶입니다.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이야기입니다. 당시 매년 12월이 되면 [빈 방 있습니까] 라는 공연이 있었습니다. 최종율씨가 연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탄 성극으로 교회 고등부에서 이것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연급에 해당하는 여관 주인 역으로 지적 장애인인 덕구가 맡았습니다. 지적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대사를 맡길 수가 없어서 '방 없어요" 라는 한 마디만 하게 배역을 맡겼습니다. 성극 막이 올랐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으로 왔습니다. 그리곤 빈 방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덕구는 "방 없어요" 라고 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극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진짜, 방 없어요?" 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덕구는 "아니요, 우리 집에 방 있어요" 라고 해버렸습니다. 덕구의 역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한 덕구의 독백이 우리 마음을 더 뭉클하게 했습니다. 덕구의 독백입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내가 연극을 망쳤어요. 그렇지만 거짓말을 어떻게 해요? 우리 집엔 빈 방이 있거든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근데 어떻게 예수님을 마굿간에서 나으시라고 그래요? 난 정말 예수님이 우리 집에서... 응, 그러니까 내 방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정말 그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예수님이 내 방에서 태어나실거다! 얼마나 신나요! 그럼요 난 내 방 쓸구요, 걸레 빨아가지고 방을 닦구요, 내 방 치워놨을 거예요. 난 예수님이 좋아요. 예수님을 사랑해요. 예수님이 최고예요! 예수님은 나 떄문에 죽으셨잖아요" 이 덕구의 독백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 아닐까요? 성탄절에 덕구의 기쁨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쁨도 예수님인가요? 공휴일이라서 기쁘고 외식하게 되어 기쁜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섬기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3. 순종의 삶입니다.
7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쉬운성경에서는 이 복종 구절이 순종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 Keyward로 나타내면 바로 '순종'입니다. 그 순종의 진수가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십자가 죽음의 잔이 옮겨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합니다. 순종의 정수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좋은 예물은 뭐니뭐니 해도 이 순종입니다. 성탄절이면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네 번째 동방박사]입니다. 교회사 전승에는 3명의 동방박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네번째 동방박사 '알타반'이 나옵니다. 네 명이 만나 떠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알타반은 3시간 늦게 도착해서 일행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만나지 못하면 7일 후에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던 만큼, 알타반은 그곳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도중에 종려나무 밑에서 신음하던 한 히브리인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도와주다가 두번째 약속 장소에서도 일행을 놓칩니다. 일행들은 포기하고 베들레햄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그가 홀로 베들레햄에 도착했을 때, 3명은 이미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떠나간 후였습니다. 그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에게 그들의 행적을 묻고 있을 때, 한 헤롯 병사가 병을 깨고 들어왔습니다. 알타반은 예수님께 드리려고 가져왔던 청옥을 그 병사에게 주고 그 엄마와 아이를 살렸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예수님의 뒤를 쫓아 애굽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그는 아기를 안은 한 노예 여인을 못본채 할 수 없어서 예수님께 드리려던 청옥을 주고 그 노예를 사서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다른 3명의 뒤를 쫒아 계속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그의 손에는 예수님께 드릴 예물이라고는 진주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듯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도 나이가 70대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다가 성문 앞에서, 아버지의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야 하는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진주를 내어주고 소년을 구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더 이상 드릴 예물도 없어 꿇었습니다."주님! 당신에게 드려야 될 것을 나는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이제 텅 빈 손, 죽어가는 몸뚱이 하나로 당신에게 왔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 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봐주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나는 청옥도 루비도 진주도 다 받았다"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드리는 순종의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 예수님을 품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비움을 통한 겸손, 섬김의 삶, 순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드리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건축]이라는 스컷 드리마입니다.배가 난파되고 몇몇 청년들이 살아남아 무인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득 쌓여있는 건축 자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본 청년들은 집을 짓자는 사람도 있었고, 교회를 짓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서 담을 쌓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담을 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는 데 건너편 섬으로부터 한 청년이 헤엄을 쳐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그가 적인지도 모른다면 그를 죽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그러다가 불켜진 무대의 중앙이 나오고 천정에 매달린 청년의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이 섬과 저쪽 섬을 함께 소유한 추장의 아들이오. 이 건축 자재는 내가 내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이 두 섬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준비한 것인데 당신들은 다리 대신 담을 쌓고 있군요"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혹 우리는 담을 쌓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담을 헐고 다리를 쌓는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족간에 이웃간에 동료간에 담을 쌓는 삶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담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축복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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