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골로새서 1장 1절~8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 설교요약
바울의 옥중에서 써 보낸 서신으로는 4개의 서신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스가 그 서신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서신 중에서 골로새 교회는 바울 스스로가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골로새는 3개의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라오게디아, 골로새, 히오라볼리는 삼각형을 이루는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골로새는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당시 2번에 걸친 큰 지진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 두번째 지진을 맞은 에바브라는 먹고 살기 위해 골로새를 떠나 160Km나 떨어진 에베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신실한 제자가 된 그는 다시 골로새로 돌아와서,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아니라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바울은 비록 자기가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이 골로새 교회를 생각만 하면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잘 될 때, 더 기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식이 그렇습니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도 더 기쁩니다. 손주에게 장난감을 사다주면 아기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더 기쁩니다. 가까운 친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보다도 더 다행이라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내 일보다도 더 즐겁고 기쁠 때가 있습니다. 내 일보다도 더 기쁘고 감사할 가족, 친구, 교회는 어떨 때 일어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이 왜 골로새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독교의 3가지 영성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감사한 것은 골로새교회가 건강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골로새교회에는 그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4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헬라어로는 '앤 크리스투 이예수'입니다. 여기서 '앤'은 '애리스'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애리스'는 '~을 향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앤'은 '향해 와서 이미 안에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이미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② 성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골로새교회에는 이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4절입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또 에게데 사랑입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있는 사랑입니다. 그들에게는 현재에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③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5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고 말입니다. 소망은 '엘피스'입니다. 엘피스는 성도가 궁극적으로 성취할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두었던 골로새 교인들의 모습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자기 먹을 것도 없어서 허덕입니다. 서로 먼저 취하려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에 서로 배려하고 나누어주며 살았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이 3가지 건강한 교회 조건,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성도에 대한 사랑',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넘치기에 바울은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려면 이 3가지 영성을 갖춘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가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새로운 이 한 주, 이 3가지 영성을 갖추기 위해 애쓰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아하 모멘트 (Aha-Moment)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문장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 장을 다 읽고도 그것이 주는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날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성경을 읽었어도 내게 마음의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냥 이야기 책을 읽은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어느 순간,'아하' 하면서 깨달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 말씀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이 아하의 순간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그냥 물리적, 신체적으로 들은 것을 들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날부터 듣게 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냥 귀로 들려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 하면서, 내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든, 어떤 연유로든 이 시간에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귀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고, 아 이 말씀이 나를 위해, 우리 가정을 위해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이어야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아하 모멘트가 살아있는 신앙이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목사님, 무슨 기도를 30분 간이나 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아내가 교회에 올 때 태워다 주는 분이었습니다. 집에 갔다가 다시 오더라도 집에서 곧장 나와야 하므로, 교회 안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렸는데, 언제나 끝나나 하면서 모니터를 통해 예배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빨리 끝났으면 싶은 마음으로 보고 있으니, 기도만 30분이 걸리는 듯 했던 것입니다. 사실 대표기도는 1분을 넘지 않습니다. 그 1분여가 그분에게는 30분이 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억지로 예배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예배가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결국 그 예배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있으면 신앙생활은 쉽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빠지면 신앙은 오히려 힘든 삶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파스칼은 17세에 세상을 뒤집어 놓을 혁신적인 수학 논리를 발표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이미 지금의 전자계산기와 유사한 기기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교만하고 물질만능주의 자였습니다. 그의 교만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31세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기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의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에는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 30분,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철학자의 하나님도, 인텔리 지식인의 하나님도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 그리고 또 확신,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이제 나의 뒷전으로 사라져버리고 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학문을 접고 두문불출하며 글을 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팡세'입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누구에 의해 와서 앉아 있든지 간에, 꼭 한번 만이라도 말씀이 깨달아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함께 하는 좋은 쉬네르고스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쉬네르고스는 동역자를 뜻하며, 그 뜻은 '짐을 같이 지고 가는 사람' 혹은 '멍애를 같이 매는 사람' 입니다. 동역자와 동업자는 다릅니다. 동역자는 '어떻든 더 지려 하는 관계'이며, 동업자는 '어덯게 해서든 짐을 덜 지려 하는 관계'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동업자가 아니라 좋은 동역자 에바브라가 있었습니다. 7절과 8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바울이 에바브라를 좋은 동역자라고 한 것은, ①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②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며, ③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에바브라 같은 사람이 많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좋은 동역의 모범이 있습니다. 그 좋은 동역자의 모범을 김재 금산교회 이자익과 조덕삼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과 이자익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도 함께 받고, 집사도, 영수도 같은 날 함께 임명되었다. 교회가 차츰 성장하여 교인이 50명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장로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장로는 설교도 하고, 실제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총책임자였다. 모든 사람들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놀랍게도 김제 지방의 유지이자 최고 갑부이며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으며 나이도 12살이나 많았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그 집의 고아 머슴이자 외지인 출신인 이자익이 가장 많은 표를 얻게 되었다. 모든 교인들이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머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머슴 이자익에게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머슴 이자익을 따르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조덕삼이 일어서서 교인들에게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그제야 투표결과를 놓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던 온 교회가 대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잘 감당해 나갔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반년 뒤인 1908년 가을, 조덕삼도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자신의 집 마부 이자익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자익은 1915년 제8회 졸업생으로서 신학교를 마치고, 그해 8월에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임실에서 목회를 했다. 그동안 금산교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여 죄대진 목사를 초대목사로 초빙하였다. 최대진 목사는 이웃 임실에서 목회하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로 청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고, 조덕삼 장로는 1905년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이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다. 그런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이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에는 첫 임직식이 있었습니다. 그때 임직을 맏는 분들에게 선한 청지기의 삶을 당부드렸습니다. 선한 청지기 정신이 좋은 동역의 기본이 되기 떄문입니다. 선한 청지기의 삶을 나는 '티 없이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이면서도 잘 못사는 자는 그 부자의 티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 티가 오만하게 하고 교만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잘 못사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티를 내어서 매사를 삐뜰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왜곡된 행동을 할 때 잘 못사는 사람이 됩니다. 가난해도 티가 없으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교에서 사역을 할 때, 이웃 교회에 다니시는 한 권사님이 제 방을 청소하셨습니다. 그 분은 권사이면서도 제 방을 들어올 때마다 항상 축복을 해 주신 후에 청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고 나가실 때도 인사로 축복 말씀을 해주시곤 떠나셨습니다. 권사님 티를 내시지도 않으셨고, 청소나 한다는 불평스런 모습도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다고 해서 아름답게 살 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물질로 잘 섬기면 됩니다. 가난한 자는 지금의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티 없이 섬기는 삶입니다.
2006년 5월 28일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선배 목사님이 주신 편지가 있습니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가끔 꺼내어 나를 돌아보며 추스립니다.
"세상에서 거저 주는 열 가지 기쁨보다
주 안에서 한 가지 고통을 감사하며
만인의 조롱함을 무서워하기보다
주님의 외면을 두려워할 것이며
인간의 방법으로 존경받는 자보다
주님의 뜻 안에서 인정받는 종 되며
천 마디 만 마디의 가증한 입술보다
한 가지 실천하는 산 믿음 되게 하사
주님의 이름으로 주께 영광 돌리고
주의 뜻을 이루는 초석 되게 하소서"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 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가 한번씩 곰씹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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