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50518_설교정리_하나님을 비전삼고 그 분을 선택하라 (창13:10~13)

서정원 (JELOME) 2025. 5. 18. 21:30

○ 말씀 전문

[창세기 13장 10~13절]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 받은 말씀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굶주린 노숙자들 앞에 빵과 복권을 놓고 선택하라고 했을 때,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복권을 선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복권을 선택했던 사람들의 결과는 모두 꽝이었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원하며 선택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과 롯은 감사하게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가축과 노비들이 함께 거하기가 어렵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택하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특히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어떤 기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까요?

 

1. 너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선택하지 말라

이 선택의 결말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롯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도 알게 됩니다. 그럼 왜 롯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너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에 대한 정확한 원문 해석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바라본즉' 입니다. 조카라면 예의상으로도 삼촌에게 먼저 택하라고 했음직 한데, 롯은 삼촌이 먼저 택하라고 하자 주저없이 발꿈치를 들고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욕심을 가지고 바라본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곳인지 그 내실을 살펴보지도 않고 보기에 화려하고 좋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두 천사가 여행 중에 한 부잣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좋은 방들은 다 제켜두고 그들을 지하방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벽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늙은 천사가 그 터진 구멍을 메꾸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젊은 천사가 이렇게 대접이 소홀한데 왜 구멍까지 메꾸어 주시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천사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행을 계속하던 그들은 다음날 가난한 농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들이 가진 가장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가장 좋은 침대를 내어주었습니다. 편안히 자고 일어난 그들이 떠나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농부가 죽은 암소를 부둥켜 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착한 농부에게 그런 불행이 닥친 것을 보고는 젊은 천사는 화가 났습니다. 그때 늙은 천사가 또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집의 지하에 있는 방의 구멍 안에는 커다란 금덩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보지 못하도록 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농부의 집 암소는 사실은 그 농부의 아내가 죽게 된 것인데 죽음의 사자가 그 아내 대신에 암소를 데려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2. 믿음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선택하라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면 그럼 무엇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것은 그가 가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동거할 수 없어서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이 그곳을 택한 것은 몸에 배인 그의 인생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세상적인 것에 단단히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택한 소돔이란 '둘러싸인 곳, 불타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욕심이 불타오르고 욕망이 불타오르는 곳이었습니다. 소알로 갔던 그는 점점 그 소돔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선택 기준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사를 할 때, 교회를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주변의 아파트를 물색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집을 정하고 그 주변의 교회를 정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난 그 분의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중심, 선택의 중심이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택의 기준은 믿음, 신앙, 복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택의 기준이 신앙이 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의 기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관의 뼈대가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의 바른 선택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고, 좌우가 아닌 그 분을 선택하라

요셉의 꿈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창세기 42장 8절과 9절에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된 후 그의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제서야 그는 어릴 때 꿨던 꿈이 생각났습니다.

만약 애굽의 총리가 꿈이었다면 그는 애굽에서의 종살이, 감옥살이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견디더라도 최선을 다하며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것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거기에 두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거기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아브람의 선택은 좌냐 우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만약 롯이 다른 곳을 선택했다면 아브람은 다른 곳이라는 개념에서 남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인생 비전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17절과 1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척박한 땅을 선택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의 비전은 좌우가 아닌 하나님을 선택할 때 보여주십니다.

직장을 얻고도 이 직장 보다는 저 직장이 좋아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은 '누하'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이 두셨다' 라고 할 때, 그 '두셨다'가 바로 누하입니다. 하나님이 두셨다고 확신할 때 영혼의 안식, 평안이 있습니다. 저 직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직장이 바로 하나님이 두셨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쁨으로 최선을 다 할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다음의 장소로 옮겨 주시게 됩니다.

새로운 한 주를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고 그 하나님을 선택하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