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50126_설교정리_나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롬10:9~10)

서정원 (JELOME) 2025. 1. 26. 23:35

○ 말씀 전문

[로마서 10장 9~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받은 말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간식을 먹고는 거실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겨울 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 꽃을 피웠을 때는 그렇게 반갑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꽃이 피어있은지도 오래 되자 매일같이 보이던 그 꽃들이 어느샌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분의 배치도 바꾸어주고 방향도 바꾸어주니,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득 오늘 예배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변화!

내 삶도 하나님 앞에서 처음 피었을 때의 꽃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무심함 속에서 방치된 삶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날마다 변화되고 성숙해가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연애할 때는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멋을 부리다가, 결혼을 하고 난 후 집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게 되면서부터는 날마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뒹굴고 있어서 부부생활이 시들어 버린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든 신앙이든 변화가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기 동족들의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었지만 복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혁과 변화의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로 봤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에 대한 말씀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축복과 은혜 속에서 살려면 우리에게도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설날이 다가옵니다. 이 새해를 맞아 내게 변화가 일어나고, 나의 그 변화를 통해, 우리 가정에, 우리 부부에게, 내가 속한 목장에게, 우리고 우리 민족에게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변화의 삶을 살려면 ...

 

1. 입술로 (삶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지독한 유교론자였습니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가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넌즈시 떠 보기에 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사흘 전 추석날, 막내숙부님이 전하는 복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시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일이나 명절 차례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고백하고 가셨다는 그 마지막 입술의 고백이 큰 위로가 되고 나의 예배의 떳떳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는 그 삶이 어떠했든, 입술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고백을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입술로 고백만 하면 구원받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어떤 배경 속에서 이 말을 하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입술로의 고백이 어떤 고백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쓴 그 시대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끌려가서 사자밥이 되었던 때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드러나지 않지만 입으로 말하게 되면 드러나게 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때였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믿는 청년 2명과 만남을 갖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들은 9시가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미행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근처를 충분히 배회를 하고 난 후에야 약속 장소에 얼굴을 내밀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잡혀가 얼굴에 황산을 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다가 들키면 이 역시 같은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씀을 외워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바로 진정한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침례를 받을 때 이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그 고백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 고백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이 마태복음 16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빌립보는 도시의 이름이고,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입니다. 도시 앞에 황제의 이름이 붙으려면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웅장함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거리에 황제의 동상이 있고 모두가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여야 합니다. 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너희는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믿음에 베드로가 한 고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역시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것을 뿌리치고 오직 예수님만을 주로 고백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여전히 '너희는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 때에 우리는 세상이 판치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예수님만이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고 여전히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고백하는 그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변화의 삶으로 새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로 고백하고 변화의 시작을 힘차게 내딛는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믿음의 루트 (Route)를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은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해야 이 믿음을 가지고 갈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3가지 주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① 믿음, ② 들음, ③ 말씀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 듣는 것에서 생깁니다. 한번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가슴에 새겨지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설교말씀을 들으도 주일마다 또 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시각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고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듣는다는 것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속극에 빠져 있을 때, 곁에서 하는 아내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의 들음과 집중하지 않고 듣는 학생의 들음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듣는다고 해서 다 같은 들음이 아닙니다. 똑같은 설교 말씀을 듣고도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말씀을 지식이 아니라 레마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레마의 말씀이란 내 마음에 단단히 심겨지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듣는 귀가 열리고, 그 귀를 통해 레마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이 뿌리깊게 내리는 변화의 삶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기쁜 일이나 행운이 따르는 일을 만나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과 행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복된 일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긴 인생을 살아오고 나서 우리가 자신있게 가장 복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우리 인생의 가장 복된 것을 13절부터 15절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삶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입니다.

얼마전 특송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전도사님의 딸 사진을 전도사님이 보내주셨습니다. 따님은 현재 뉴욕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수시로 지하철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그 본 그 얼굴에는 늘 환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지난번 특송을 했던 날도, 특송을 하고 난 후, 예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미국으로 출발을 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섬기는 교회에서 수련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일정을 앞당겨서 출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행기표를 급하게 변경하게 되어 100만원이 더 들게 되었지만 그녀는 흔케히 조기 출국을 했다고 합니다. 복음 전하는 기쁨으로 사는 모범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안식월을 보내면서, 이기풍 목사님이 개척하신 성안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조선의 바울이라는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그분을 따라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① 선교사를 떼려눕힌 핍박자, ② 한국 교회의 최초의 선교사, ③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입니다. 당시 제주도는 아무도 목회하러 가지않으려고 했던 외딴섬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때 과감하게 손을 들고 자청했던 분이 바로 이기풍 목사였습니다. 지금 제주도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성안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들입니다. 복음에 대한 한 사람의 역할이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먼저 소천하시고 혼자가 되셨던 사모님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말라'라는 말씀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어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청소년들을 격려해 주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고 복음 전하는 자의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 복음 전하는 기쁨이, 2025년 나의 가장 복된 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후회되지 않는 일이 예수님을 만나고 선택한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