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에베소서 3장 17~19절]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받은 말씀
유대인들은 보통은 서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정말 간절한 기도를 할 떄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기도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렇다면 그는 에베소 성도들의 무엇을 위해 무릎까지 꿇고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간정한 기도를 해야 할까요?
1. 속사람 (내면건강)의 강건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사람은 우리의 영혼, 혹은 내면을 말합니다. 그 속사람이 건강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 영혼이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이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이 없는 사람 보다도 이런 사람을 더 대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예수쟁이들은 고집불통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게 되면 어른스러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이해심이 커지고 인내심이 강해진다고, 그래서 포용력이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금의 노인들 중에는 갈수록 고집스러워지고,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심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르신'이라는 소리를 듣기 보다는 '저런 영감탱'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건강을 추구하지 않는 삶의 태도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나이가 들수록 내 안에 '분노하는 아이', '질투하는 아이', '불평하는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몸은 어른처럼 자라면서 건강하지 못한 내면이 함께 자라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 건강 못지않게 내면, 즉 내 속사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속사람은 내가 마음을 다진다고 해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요한3서 1장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성령의 도움을 통해 속사람이 건강하게 되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주님과의 실제적인 동행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예수님이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기도를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거한다'는 말에는 '파로이케오'와 '파토이케오'가 있습니다. 파로이케오는 잠시 잠깐 머무를 때 사용되는 말이고 파토이케오는 정착하여 상주한다라고 말할 때 사용됩니다. 당연히 오늘 기도 속에 있는 말은 '주님이 내 인생에 함께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알려고 무척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왜 이땅에 오셨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빠삭하게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날마다 성경을 읽고, 그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것은 그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을 넘어 예수님 그 자체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 자체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실제로 내 삶 속에 계시며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삶을 만들어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내면이 강한 사람이 됩니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집니다. 그로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동행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을 새롭게 알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성도들이 교회에 모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했을까요?
왜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지를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앙 간증론]에서 설명했습니다. 변화의 모티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Emotion (Feeling, 감정, 감상)이고, 또 하나는 Affection (정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Emotion은 순간적인 변화는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Affection만이 우리 마음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뿌리, 애착, 진짜 마음을 바꾸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TV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힘들게 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내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세속주의, 황금만능주의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우상의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부터 안전한 내 노후를 챙겨야겠다는 마음, 내 것부터 충분히 챙기고 남을 돕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필리핀으로, 다른 오지로 선교활동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런 변화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마음의 깊은 곳을 터치할 수 있는 Affection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고, 인생의 바른 가치관을 발견했을 때 바뀝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이 다 딱딱한 것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Emotion의 감정 앞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욕심을 내려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암'과 같은 인생의 막다른 문제 앞에 놓였을 때, 비로소 자기 삶의 가치관이 변하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변화를 원한다면 Affection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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