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611_설교정리_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엡 1:3~5)

서정원 (JELOME) 2023. 6. 12. 07:43

○ 말씀전문

[에베소서 1장 3~5절]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받은 말씀

우리는 살 나가는 사람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잘 풀리지 않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지지리도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는 세상적인 복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얘기하는 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바울이 느끼고 행복해 하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입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세상적인 복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그럼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복은...

 

1. 성부 하나님이 우리이게 예비해주신 축복입니다

지난주에 강릉에서 목회자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의 독특한 점은 참석하는 목회자들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후배 목회자를 한 사람씩 초청해서 함께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충주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데, 초청하고자 한 후배 목회자는 대전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충주에서 강릉으로 곧바로 가면 가깝지만 그 목사님은 충주에서 대전으로 냐려가서 그 후배를 태워서 다시 강릉으로 올라왔는데, 그 오가는 길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로부터 택함을 받는다는 것은 택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이처럼 기쁜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택함을 받는 것도 기쁜 일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거기다가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삼아 준다는 것이 당시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그 복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자삼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트리아 포스테스타스'입니다. 파트리아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포스테스타스는 절대권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시 아버지에게는 자식을 살릴 수도,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기 친자가 시원치 않으면 아들을 포기하고 양자를 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자를 삼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양자로 삼고자 하는 사람의 친아버지가 부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그 양자를 돈을 주고 사야합니다. 그것도 한번만 사는 것이 아니고 세 번을 사야 합니다. 세 번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양자로 삼겠다는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요약하면 아버지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고, 양자를 삼고자 하는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한번 자녀삼아 주시면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이같은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복을 가볍게 여기고, 이 축복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이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주신 축복입니다

성부 하나임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택함심'과 '자녀삼아주심'이었습니다. 그럼 성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속하심'과 '죄사함'의 복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이라는 것은 '대신 구속해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에는 '아고라조'와 '루트르'가 있습니다. 아고라조는 '물건을 사고 값을 치루어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도 값을 치르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루트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반적인 돈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 피로 우리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닭을 잡기도 하고 돼지를 잡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더러 닭을 잡으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작은 닭 한마리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징그럽던지 도망을 쳤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돼지를 잡을 때, 그 돼지가 울부짖던 소리, 돼지를 잡던 사람들의 피범벅이 된 손이 얼마나 몸서리치게 느껴졌던지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죄를 짓게 됩니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질긴지 알게 해줍니다.

바울이 역설해주고 있는 것의 결론도 바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던 자신이 완전히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양치는 언덕]이라는 책에는 나오미라는 아가씨와 술주정뱅이인 요이치가 주인공입니다. 나오미는 술꾼인 요이치를 따라 가출해서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2년만에 나오미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집 대문이 2년 동안 열려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오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꾸중 대신 마치 그녀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양, '나오미, 인제 오느냐?' 하면서 반겨주었습니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요이치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구석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그림만 그리고 지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전에 만났던 여인 중의 한 명이 전화를 해서 보고싶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작정한 요이치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그녀의 요구는 끈질겼습니다. 딱 한번만 만나주면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요이치는 그녀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요이치에게 술을 권하며 딱 이 한잔만 마시면 떠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거기엔 수면제가 타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그 잔을 마시고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그곳을 나옵니다. 수면제로 인한 졸음으로 그는 결국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게 됩니다. 그를 떠나 보내고 나서 나오미는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 덮혀진 화폭을 걷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십자가 아래에 엎드려 울고 있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머리로 떨어지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요이치를 변하게 한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냉정하게 되돌아 보면, 예수님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울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심을 알고 그 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끈질긴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고, 내가 지었던 모든 죄악을 대속해 주신, 그 예수님이 우리에겐 무엇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성령님이 우리에게 예비해주신 축복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택하심'과 '자녀삼아주심'의 축복을 주셨고, 성자 예수님은 '구속하심'과 '죄사함'의 복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성령 하나님이 주신 복도 있습니다. '인치심'과 '보증하심'의 복입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인친다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안전과 불가침, 그리고 소유를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것이니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니 끝까지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명확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증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보증은 헬라어로 '아라본'이라 하는데, 영어의 Down payment, 우리 말로는 '선수금'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아파트를 살 때 선수금을 지불합니다. 10억짜리 아파트를 3억원의 선수금을 지불하고 계약한다면 그것은 내가 반드시 그 아파트를 사겠다고 작정함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산다는 보증의 의미입니다. 통상 10%의 선수금을 지불하지만 만일 더 많은 선수금을 지불하고 계약한다면 그만큼 내 마음이 확고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선수금을 주고 보증을 세웠습니다. 그 보증에 지불한 선수금이 십자가 보혈입니다. 죽음으로 보증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영혼은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8장 35절부터 37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매사 넉넉히 이기게 하는 이 능력과 힘을 주시고 보증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축복합니다.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왜 유독 내 인생은 이꼬라지인가 싶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상기하고, 깊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이 다시 되살아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 나서, 죄를 짓지 않아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꼭 기억하시고 이 한주도 주와 함께 하여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