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521_설교정리_영적인 요요현상을 경계하고 조심하라

서정원 (JELOME) 2023. 5. 24. 15:59

○ 말씀전문

[느헤미야 13장 4~5절]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 받은 말씀

2017년도에 이곳에서 개척을 시작하면서 [늘 마음에 새겨 실천하자]는 다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감할 때 민감하고, 둔감할 때 둔감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그 반대로 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특별히 일상적 예배가 무너진 코로나 시기엔 나도 모르게 성도들의 외형적 숫자에 민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말씀, 기도, 그리고 은혜에 민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민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난 내 자신을 다시 채찍질하곤 했습니다.비단 목회를 하는 저 뿐이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미련을 두거나 붙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둔감해야 할 일에 너무 민감하고, 민감해야 할 일에 둔감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민감해야 할 것에 둔감해 있는 모습, 둔감해야 할 것에 민감해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성벽 재건을 마치고 봉헌식을 하면서, 이제는 민감해야 할 것에 민감하고 둔감해야 할 것에는 둔감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장에는 느헤미야가 점검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때 내가 본즉' 이라며 점검한 내용이 3번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제대로 세워져 가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느헤미야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검은...

 

1. 영적인 요요현상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이어트를 시도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체중을 줄였지만, 이내 원상 복귀되거나 다이어트 이전보다 더 체중이 불어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것을 요요현상이라고 합니다. 그 요요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① 무리한 끼니 거르기, ② 위험한 저열량 섭취, ③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갑짝스럽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하면 이러한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요현상이 없으려면 조금씩 조금씩, 차근차근 몸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느헤미야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봉헌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써 고생한 희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다들 힘들게 성벽을 재건하였으므로, 느헤미야는 그 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영적 부흥을 점검한 느헤미야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한 방]이라는 큰 챔버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많은 물품들을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도비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할 때,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했는 사람입니다. 그 방해가 먹히지 않자 약한 틈을 타서 성전에 자기 영역을 마련하려고 수작을 부렸고, 제사장 조차도 거기에 넘어가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고 영적 바탕을 회복했는데, 그 회복이 다시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은 느헤미야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7절부터 9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그 방을 철거하여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그릇으로 다시 채워놓았습니다. 성벽 재건 후의 영적 요요현상을 바로잡았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 요요현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의 은혜, 한번의 빡쎈 헌신도 중요하지만 그 지속성이 더 중요합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QT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받은 은혜가 순간적 기쁨으로 사라지지 않고 주중 내내 내 삶의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식습관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키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날마다 거두는 원칙입니다]. 그날에 일용할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 더 가져가 봐야 그것은 다음날 썩어서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은혜가 내일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책임이 동반된 은혜]입니다. 백성들 각자가 직접 나가서 거두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지 부모가 대신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받는 은혜는 부모의 은혜이고, 자녀의 은혜는 자녀의 몫입니다. 

삶도 신앙도 어느날 갑짜기 한방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방으로 이루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차근차근, 지속적으로 다듬어지고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꾸준히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신앙이 무너져 있다고 여겨진다면 내게 이 요요현상이 찾아온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2. 일상의 사소한 죄를 방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1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안식을 점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음식물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일요일에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예배를 드리러 가지 전에, 짬을 내어 잠시 음식을 팔고, 예배시간에 맞추어서 교회에 나가면 되는데 그게 죄가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혜미야는 이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보면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하고 있는데, 그 대상들을 보면 사소하기 그지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사소한 죄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것쯤은'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점점 그 대상을 키워가게 합니다. 하나씩 양보하다 보면 나중에는 근본이 무너지는 데까지 갑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는 것도 '이것쯤은' 하는 생각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았던 신앙이 무너지는 것도 '이것쯤은' 하면서 하나씩 양보하고 게으름을 피웠던 결과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많은 헌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들이 숨기고 내놓지 않은 것은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시대적 배경과 이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신앙의 본질이 함께 어우려져 나타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물 시대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가는 절정기였습니다. 그러한 때, 죄와 거짓은 세워져가는 교회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쉽게 간과해서는 안되는 시기였습니다.우리는 큰 죄는 조심하지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죄는 간과하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커피잔에 파리가 앉았다면, 그 파리가 커피를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커피를 마시지 않고 버립니다. 지인이 명품 매장에 가는 길에 잠시 동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그 명품 옷자락에 자세히 보지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흠이 보였습니다. 그것을 지적했더니 매장 직원이 제 지인에게서 명품을 다시 달라하고는 환불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점원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 흠인데 조금 싸게 해서 팔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흠이 있는 상품은 싸게 해서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나 작은 죄나 같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소한 죄라도 간과하지 않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듯, 사소하게 넘겼던 죄가, 하나 둘 양보하다 보면 큰 죄를 저질러도 무감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사소한 죄나 잘못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지 항상 점검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다음세대의 신앙 전수를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사기 2장 16절을 읽을 떄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가 가고 난 후의 다음 세대를 다음 세대라 부르지 않고 '다른 세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 세대라고 할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음으로 점검한 것은 23절과 24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통혼의 문제와 그로 인한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이방인과 통혼한 자녀들이 이방말은 더듬더듬 하는데, 이스라엘 말은 아예 하질 못하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베트남 여인을 얻어 국제결혼을 했는데 아이가 우리말은 전혀 못하고 베트남 말만 띄엄띄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심이 뛰어난 장로님일지라도 그 자녀에게 신앙을 넘겨주지 못하면 손주 세대에 가서는 그 할아버지가 장로였다는 흔적은 깡그리 사라집니다. 그래서 망각의 시간은 1세대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한번만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 중에 Next Generation (다음 새대 양육)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4층에 청소년 예배실도 준비하고 여러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하여 실행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집사님이 '말로만 다음 세대를 부르짖고 있지는 않나?' 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시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간만 신경 쓰고 있지는 않나? 철학과 헌신과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으시면서도,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와 네 자녀를 돌아보고 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위해 그들의 영혼 구원과 믿음을 위해 울고 있나요?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 중에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세대가 되도록 사랑과 관심을 줄 때입니다. 이 일에 소홀함이 없는지 돌아보고 점검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