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514_설교정리_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 (느 11:1~2)

서정원 (JELOME) 2023. 5. 14. 21:36

○ 말씀전문

[느헤미야 11장 1~2절]

1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 받은 말씀

손경민 목사님이 작곡한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가사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는 고백, 어느 것 하나 은혜요 축복이요 감사가 아닌 것이 없다는 고백, 우리에게도 이 5월 한 달이 그런 고백으로 넘쳐나는 한 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11장부터 성벽 재건 후에 거행된 봉헌식 내용입니다. 처음 성벽 재건을 시작할 때부터 무수한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성벽을 재건해 낸 것 만도 은혜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기에 더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더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붙들어야 할 영적 레슨은...

 

1. 귀한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잊지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성벽 재건을 마치고 나자 또다른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것은 재건한 성벽 안에 누가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벽 안에 살게 된다는 것은 그 성을 책임지고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일어난다면 1차적인 타겟이 예루살렘성이 됩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도 성 안에 거주한다는 것은 커다란 제약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본업은 목축입니다. 목축을 하려면 성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 안에 거주하게 되면 그 생업 외에도 성을 지키는 헌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① 백성들의 리더들입니다. ② 제비뽑힌 사람들입니다. ③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성 안에 거주하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첫째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자의 몫입니다. 가정에서 가장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사람은 가장입니다. 가장이 헌신하기를 포기하면 그 가정의 안위는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입니다. 그들이 헌신을 피한다면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게 됩니다. 국가에서는 지도자들입니다. 공동체에서는 리더들입니다. 이들이 자기 위치에서 헌신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성 안에 거주하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둘째 제비뽑힌 사람들입니다. 헌신의 자리를 감당하도록 선발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병역 의무를 기피한다면 그 국가는 존망이 어렵습니다. 전쟁에서 밤에 보초를 서게 된 사람이 자기는 하기 싫다고 기피한다면 적군의 기습에 점령당하게 됩니다. 헌신을 위해 뽑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헌신을 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하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든 어떻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마음도 가볍고, 하나님의 기쁨도 됩니다. 

성 안에 거주하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셋째, 자원한 자들입니다. 이왕 해야 할 헌신, 다들 하기 싫어하는 헌신, 그것을 자원하여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헌신자들입니다. 그런 헌신자들 때문에 공동체가 허물어지지 않고 굳건하게 유지발전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로뎅의 조각상 중에 '칼레의 시민들' 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항구 도시인 칼레가 있는데, 이 도시가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1년 가까이 항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 시는 항복을 하는 대신에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약속해 달라고 영국군에 요청을 했습니다. 영국은 끈질긴 칼레의 항전으로 많은 병사들이 희생 되었다며, 항복조건을 수락해주는 대신, 6명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6명으로 택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군중 속에 있던 일반 백성 한 명이 자원하여 자기가 그 여섯 명 중의 하나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뒤따라 리더의 위치에 있던 시장과 법률가들이 자원해 나섰습니다. 그 여섯 명의 끌려가는 모습을 조각한 상이 바로 로뎅의 '칼레의 시민들' 입니다. 끌려간 그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임신한 영국 왕비가 출산을 앞두고 이러한 끔찍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꺼림칙하여, 사형을 중단하도록 왕을 설득하고, 결국 죽음 직전에 그들은 목숨을 구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작상 중의 끌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공포에 찌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조각상에는 받침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안전한 설치를 위해 받침대를 만들기를 요구했지만 로뎅은 끝내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얼굴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그들이 두렵지 않아서 자원 한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헌신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받침대를 거부한 뜻은 그들이 높은 지위 때문에 나선 것이 아니라, 시민 중의 하나, 평범한 일반 사람 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헌신은 여유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기에 헌신합니다. 세상에서 제 목숨이 아깝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헌산합니다. 이렇게 어렵게 헌신한 사람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헌신한 사람들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에 대한 감사입니다. 기억입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는 인색한 것이 '수고했어요', '감사해요' 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한마디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한마디가 필요한 이 5월 가정의 달입니다. 말 한마디가 가정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이 가정의 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축제와 쉼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부부의 가장들이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다 보면 놀 줄도 모르고 쉴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도 죽어라 일만 하라고 지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죽으라 일만 하고 쉴 줄 모르면 그것이 가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일할 땐 열심히 일하고, 즐길 땐 잘 즐기고, 쉴 땐 푹 쉬는 사람이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것처럼 축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축제를 즐기기도 하셨습니다. 안식의 시간도 가지셨습니다. 안식의 중요함을 역설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성품을 닮아가려면 삶의 방식도 닮아가야 합니다. 

성벽 재건 후의 봉헌식 모습에서도 이런 축제와 쉼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봉헌식의 Key ward가 어쩌면 축제와 쉼처럼 보입니다. 12장 27절부터 29절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우리는 자칫 그리스도인은 항상 경건해야 하고 절제해야 하고 차분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사람들, 부족한 사람들이 세상에 넘치는데, 어떻게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느냐고, 그렇게 하는 것을 죄악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축제도 하고 쉬고 놀 때도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성경적 안식이 우리의 삶을 오히려 새롭게 해 줌을 가르쳐줍니다. 

성경적 안식은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축제)'라고 합니다. 그쳐야 할 때는 그치는 것이 성경적 안식법입니다. 일과 생산과 성취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쳐야 할 때는 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과 근심과 긴장을 그쳐야 할 때인데도 그것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으로 폭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축제의 향연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을 즐길 수 있어야 하며,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계절 5월입니다. 숲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도 일만 고집하고, 걱정과 근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쉼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끝나고 쉬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그 끝남은 영원히 찾아오지 못합니다. 억지로 떠난 휴가 기간에도 일 걱정으로 가족들에게 굳은 얼굴을 보이면, 그것이 어떻게 쉼이 되겠습니다. 쉬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안식이 오히려 새로운 내일을 만드는 힘이 됨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삶은 일만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일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축제와 안식을 통해 옵니다. 일할 때는 즐겁고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때는 일을 잊고 함께 축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쉬어야 할 시간에는 쉬어주어야 더 길게 더 능룰적으로 일할 수 있음을 알고 쉴 때는 확실히 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3. 감사에 눈 띄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행복의 크기는 감사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봉헌식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봉헌식에서는 축제와 안식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축제와 안식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도 함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2장 24절입니다.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무엇으로 끝납니까? '감사하며' 입니다. 축제와 안식을 통해 감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무엇이 나타나 있나요" '감사하며' 가 있습니다.

31절입니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감사 찬송하는 자' 입니다.

38절에도 있습니다.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감사 찬송하는 무리들도 보여주십니다.

결국 봉헌식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라고 하나요? 축제와 안식을 하면서 '감사를 찾아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함께 쌍둥이처럼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찬송'입니다. 감사는 찬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영혼이 회복되는 사람들을 보면 입술에 찬양이 살아납니다. 찬양이 살아남아 감사가 살아나게 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할 것이 감사일 텐데, 그 감사가 빠져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기본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성령의 열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아이들이게 가르칩니다. 누가 먹을 것을 줄 때는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고, 누가 선물을 주면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만약 어른이 된 사람에게 이럴 때는 '감사합니다' 라고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가장 기본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감사입니다. 신앙의 수준은 감사함이 얼마나 나오는가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정말 복된 인생일까요? 재산이 많거나 돈이 많은 사람일까요?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까요? 세상이 주는 것이 많다고 넉넉하다고 복된 인생이 아니라, 감사에 눈 뜬 사람, 감사의 눈이 띄여진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2017년도에 개척을 하고, 곧 이어 코로나 펜데믹이 찾아왔습니다. 예배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암담한 시간을 지내야 했습니다. 2023년 5월입니다. 함께 섬겼던 사람들이 다 돌아왔습니다. 예배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끝났으니 당연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당연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삶, 그것이 온전한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감사를 깨닫고, 그 감사를 능력으로 삼가 살아가는 복된 가정의 달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