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430_설교정리_'아멘' 이후의 삶에 책임을 져라

서정원 (JELOME) 2023. 4. 30. 21:57

○ 말씀전문

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30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 받은 말씀

우리는 '아멘' 이라는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합니다.

매일 아침, 목장의 목자가 짧은 말씀 구절 하나를 카카오톡 단체 방을 통해 보내옵니다. 그러면 목장원들이 너도나도 인사 겸 '아멘' 하고 화답을 합니다. 하루가 이 '아멘' 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 '아멘'은 어쩌면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이 꼭 나를 향해서 하는 말씀처럼 다가옴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확신하며 '아멘' 하고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의 '아멘'은 형식적인 화답이나 인사 치레가 아니라 진정한 '말씀의 은혜', 공감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심지어는 교회 문을 나서면서 그 '아멘'의 감정과 결단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새롭게 충전해 주시는 말씀의 기쁨을 알기에 그 힘든 농번기에도 빠짐 없이 새벽기도에 참석하시고, 말씀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꼭 남의 집 담벼락에 열려있는 호박 하나를 따서 귀가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의 효력이 얼나나 지속되는 것일까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멘'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아멘' 이후에, '아멘' 했던 그 삶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변화의 결단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았을 때의 '아멘'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아멘' 이라고 부르짖었던 이후에도 그 '아멘' 한 것에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아멘' 이후의 삶에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려면...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을 기획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기획력이 좋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획력이 부족하다며 '기획력 향상과정'을 찾아서 교육을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획력이 좋은 사람을 보면, 순간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그 순간적인 아이디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적인 아이디어를 키워서 커다란 이미지로 만듭니다. 날로 먹으려는 조급함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서, 말씀 묵상을 통해서 받은 그 '아멘'을 단편적인 감동으로만 남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시적인 공감에 머무르지 않고, 내 삶을 통해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성경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무너져 내렸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 26절과 34절입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26절),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34절).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을 통해 깨닫는 '아멘'은 무엇입니까? 내 신앙이 무너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속에 말씀이 무너져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말씀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이 그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29절).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했으면, 그 '아멘' 이라는 감정에서 만족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원래의 위치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멘' 이후의 삶이 진정한 '아멘'의 삶이 됩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를 '상대주의'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들 합니다. 나는 그 정의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상대적인 개념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오더라도, 절대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이 변해갈수록 '권위주의'가 상실될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권위주의 타파라는 기치 속에서도 부모나 스승의 권위가 완전히 상실되어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바람직한 세상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올바른 권위, 스승의 사랑의 권위가 사라지는 것을 원합니까? 아마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포스트 모던 시대가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위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옳은 길을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혹은 세상 속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 옳는 의견이고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갈등이 없습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세워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먄 흔들리지 않는 '아멘'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한 주도, 내 주장을 세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세워가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세상과 다르게 살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 하겠다는 공약들을 내어 놓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중에 자기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사전에 공약한 말 중에, 방탄국회를 뿌리 뽑겠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넘어오자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제시했던 공약을 버릴 때, 우리는 큰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기준을 세웠으면, 그것이 하찮고 작은 기준일지라도, 자기에게로 돌아온 발목일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지키는 자를 우리는 신뢰하게 됩니다.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아멘' 했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정립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돌아봤습니다. 그럼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세웠던 기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준을 세우고 나면, 그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기준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30절과 3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은 후에 결단한 변화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① 딸들을 이방인들에게 시집 보내지 않겠다. ② 아들들을 위해 이방 딸들을 데려오지 않겠다. ③ 안식일을 잘 지키겠다. 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아멘'으로 화답한 자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살것인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렸던 시대에는, 그들은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과 뒤엉켜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로서, 뭔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한번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유익한가, 다니지 않는 것이 유익한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열띤 토론 후에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답게,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장로님의 아들이 벌떡 일어나서는 '우리 아버지가 장로인데, 내가 볼 때, 야! 다 똑 같애' 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목사 냄새가 나는 목사는 과연 얼마나 되고, 성도 냄새가 제대로 나는 성도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아멘'을 삶의 기준으로 세우고, 그 기준을 삶의 키로 삼아서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무실에 비치하고 늘 나를 되새겨 보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나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지나간 삶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 삶은 사등분으로 구성된 듯 했습니다. 20대까지는 배움의 시기였고, 33년은 대기업에서 열심히 돈을 버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6년간은 대기업에서와 똑 같은 직장생활이었지만 돈을 번다기 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같은 직장 생활이었지만, 대기업 33년은 임원이 되려고, 그래서 더 많은 월급을 받으려고 발버둥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 사장으로 근무해 온 6년간은 더 높은 자리도 없을 뿐더러 더 많은 연봉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힘들게 직장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잘 해 줄 것인지? 그들이 근무하는 직장이 그들의 안식처처럼 느껴지게 할 것인지?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크게 공감이 되고 '아멘'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바라볼 수 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르게 사는 것,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아멘'이 죽지 않고 꽃을 피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은 말씀에 대한 공감입니다. '아멘'은 말씀을 삶의 기준이 되게 꽃 피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내 기준에서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내 기준, 내 승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헌신'이라고 목사님은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헌신'에 대해 '새 것', '처음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5절부터 3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똑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그 표현들은 다 '처음'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단어는 시기적으로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가장 좋은 것'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The라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The firstfruit, The firstbone. 농사를 지어서 거둔 열매를 마당에 쫙 늘어놓으면 어느 것이 첫 열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천 마리의 양을 치는 과정에서 태어난 새끼 중에서 어느 새끼가 첫 새끼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인만은 그것을 압니다.

성경은 '처음'의 것,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주인과 하나님만이 압니다. 처음의 것이 아닌 것을 처음의 것이라고 하면서 드려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드리는 자의 '진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부자가 되게 할 수도 있고 하루 아침에 몽땅 잃게 할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건강을 지켜주시기도 하고 불치의 병에 걸리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딱 한가지 하나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만은 하나님도 어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그 진심을 받고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삽니다. 우리는 말씀의 '아멘'으로 살아갑니다. 은혜 받은 자로서 우리가 화답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진심입니다. 똑같은 찬양을 해도 진심으로 하는가 건성으로 하는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 봉사로 드리는 것에 앞서서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진심을 드리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아멘' 이후에도 '아멘'으로 화답한 책임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삶, '아멘'으로 그치지 않고 말씀으로 삶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삶, 그리고 그것의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내 진심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멘'으로 화답한 데 대해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