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30212_설교정리_느헤미야강해(2)_세상의 아닥사스다를 의지하지 말라

서정원 (JELOME) 2023. 2. 12. 11:07

○ 말씀전문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 받은 말씀

느헤미야가 어떤 사람인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는 약했을 지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 보다도 강했던 사람이며, 섬길만큼 리더십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기도하는 지를 살펴 봄으로서, 우리도 하나님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생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1. 세상의 아닥사스다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지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일했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율법의 주권자' 혹은 '왕중의 왕'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입니다. 에스더에게는 양아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닥사스다는 극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이며, 폭군에 해당하는 왕이었습니다. 철권정치를 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 밑에서 술관원장으로 일하려면 왕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5절입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앞에도 수많은 아닥사스다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권을 쥐고 있다고 여기는 무수한 대상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나 사장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갑니다. 거래처가 내 사업의 생존권을 쥐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돈이 내 인생을 틀어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야 처럼 그 아닥사스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편 146편 3절과 5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모든 능력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김하중 대사는 최장수 중국 대사였는데, 그는 그곳을 하나님이 파송하신 일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대사'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의 철칙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기도를 드리고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능력은 기도에서 나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 시작하는 일 조차도 아닥사스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을 최 상층에 두며 살았습니다. 

역대상 29장 12절입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한주를, 일을 시작하기 전에, 또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믿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가끔 의구심을 갖습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이 정말 들어주실까? 내가 기도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라고 반문합니다. 그 답을 느헤미야 1장 4절과 5절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금식까지 하며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짜 자기의 기도를 보고 듣고 계시다는 믿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기도라면 이렇게 금식까지 하며 울부짖지는 못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믿고 기도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느헤미야에서 보여주는 그의 기도문이 아주 길다는 것입니다. 그 긴 기도문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은 그가 같은 내용의 기도를 여러번 반복해서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까먹지 않고 기억해서 기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기도했음은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포로들 중에서 느헤미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이 느헤미야 외에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이 유독 느헤미야에게서 본 것은 느헤미야가 자기의 기도를 믿었다는 것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도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는 모습입니다. 

본교에서 청년부를 맡고 있을 때 청년들에게 기도를 하자고 하지만 잘 안합니다. 오히려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더 뺀질뺀질하게 기도를 빠져나갑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도하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특별기도' 자리를 만들고자 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충격적인 응답을 주셨습니다. "너는 네 기도를 정말 믿으며 기도하냐? 너도 믿지 않고 기도하는데 애들이 기도를 하겠냐?" 그때부터 제 기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확신하며 기도하는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익숙한 예배, 익숙한 기도는 그냥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를 우리는 부흥의 불꽃이 일어난 기점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 1903년에 이미 그 조짐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03년 하디 선교사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이땅에 복음이 불타오르지 못하는 것을, 이땅의 게으른 백성들, 우상에 의지하는 민족성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것이 이땅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로 인함을 깨달았습니다. 제 스스로가 선교사로 와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6절과 7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의심하며 기도하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믿고 기도하여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문제에 대한 책임있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를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책임지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 책임감으로 기도한 사람'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술관원장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지만, 조국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아버지와 황후인 에스더의 이야기를 어떤 경로로서든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에스더에 대해서는 같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들었을 것입니다. 에스더 4장에 기록된 모르드게와 에스더의 말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에스더 4장 14절부터 16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황후로 세움 받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모르드게가 했던 말, 그것은 느헤미야가 왕의 술관원장으로 세우신 뜻고 같지 않겠느냐고 느헤미야는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절규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는 민족을 위한 책임을 느끼고, 그 책임의 몫을 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결국 러더입니다.

본교에서 역시 대학생 사역을 맡고 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큰 교회라서 수련회를 가면 약 천명 정도 가게 됩니다. 큰 무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앞서서 헌신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헌신해 줄 사람들은 나오라고 하면 우루루 달려나옵니다. 그러나 수련회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나면,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런 섬김의 모습들은 사라집니다. 믿음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의 학생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이 수련회 때 기도한 것에 대한 책임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책임있는 기도와 헌신이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말씀 중에, 기도 중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아멘이 진정한 아멘이 되려면, 말씀에 책임을 느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한 입술의 후렴구에 불과합니다. 가정 문제, 교회 문제, 직장 문제, 회사 문제, 그 어떤 문제이든 책임있는 기도가 있을 때 비로소 바뀝니다. 해결됩니다.

어렵게 생활하시는 한 집사님이 겨울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셔서 목 밑이 마비가 되는 안타까운 일이 우리 교회에 있었습니다. 제 사모가 그 분을 위해 매일 아침 금식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책임있는 기도를 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다치신 이후에 밤새 고열과 고통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분이 자기 아내에게 "당신이 어제 밤에 힘들게 다리를 주물러주어서 고통 없이 잘 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 아내가 "어제 저녁에는 내가 너무 힘들고 피곤하여 주물러주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잤는데"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주무름이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텃치 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모가 "그 시간이 자기가 열심히 기도했던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며 놀라워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의 사랑, 그것은 애정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책임있는 헌신이 있을 때,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문제에 책임지고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고, 책임지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는 세상의 권력인 아닥사스다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였으며, 책임있는 기도로 하나님이 일하시게 했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아의 삶을 본받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