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 받은 말씀
하나님의 선한 손에는 ① 도우시는 손, ② 잡아주시는 손, ③ 만져주시는 손, ④ 인도하시는 손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선한 손의 응답이 주어지기를 항상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손의 도움을 입는다고 해서 만사형통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손의 도움을 받고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하고 기억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깨우치고자 합니다.
1. 영적인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도 장애물과 역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아무런 장애물 없이 순탄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느헤미야에게도 그 징조가 나타납니다. 10절입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왕의 재가를 받고 그 조서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애인지 19절이 보여줍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산발랏은 사마리야의 총독으로서 반이스라엘의 우두머리였다고 보면 됩니다. 도비야는 암몬의 족장이면서도 산바랏의 참모 역할을 하는 자였습니다. 얼마나 교활하고 지능적인 자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게셈은 사마리야와 동맹을 맺은 남쪽 지역의 영주였습니다. 그들은 아닥사스다 왕의 휘하에 있으면서도, 왕의 조서까지 받은 느혜미야였지만,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가진 뜻을 보면 산발랏은 '간신히 생명을 주었다' 라는 뜻입니다. 아주 세상적인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도비야는 '여호와는 선하시다' 라는 뜻으로 성경적인 이름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우리의 대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믿는 사람 중에서도 대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Non-크리스쳔에 의해서만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 속에서도 영적 도전자는 언제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대적들도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산발랏과 도비야는 첫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 말과 언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상황과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낙심과 좌절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분열과 이간질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영적인 방해와 해방꾼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 사람, 말, 환경까지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알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낙심하거나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면, 아하 내게 영적인 산바랏과 도비야의 도전이 있었구나 하며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낙심과 좌절과 이간질 같은 도전은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군에서 다른 병사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것도 죄를 짖는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 군은 적에게 패하게 될 것이라고 퍼뜨리게 되면 군의 사기가 떨어져서 결국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낙담시키는 사단의 횡포는 많습니다. 그 횡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서, 경계함으로써, 사람이든 말이든 상황과 환경에 의한 것이든 싸워 이기는 이 한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비전을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영적 도전 앞에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승리하는 키는 비전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명확할 때 우리는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영적 도전자를 물리치고 이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봅시다. 12절입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이 말씀을 통해 느헤미야가 가진 비전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① 비전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② 비전의 타겟은 예루살렘입니다. ③ 비전의 인큐베이터는 내 마음입니다. 비전은 주체를 명확히 하고, 타겟을 명확히 하며, 인큐베이팅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진정한 비전이 됩니다. 12절에는 그 구성 요소가 명확히 정의되어 있습니다.
비전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난 내 하나님이 있을 때 비전이 생깁니다. 비전은 부모가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형성하려면 내 하나님을 내가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뚜렷한 타겟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타겟이 있을 때 비전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갈팡질팡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전은 내 마음 속에 다지고 다져서 인큐베이팅 되어 갑니다. 달랑 한 번 생각했다고 비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 다지고 다져서 굳건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비전이 됩니다.
이 확고한 비전, 하나님에 대한 비전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도전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환경을 극복하고 영적 도전까지도 극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전을 갖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행동 했을까요?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여기서 '후에'라는 것은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을 받은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왕이 준 조서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옛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말자고 역설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에 위축되기는 커녕 '일어나 건축하자'라고 일어섰습니다. 비전을 갖고 공유하고 나누기 시작하면 마음과 뜻을 모으게 됩니다. 비전이 힘입니다. 비전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비전으로 무장할 때, 그 어떤 도전 앞에서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일어서서 승리하게 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힘이 우리 교회에도 일어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혹시 개척의 꿈이 내 개인적인 야망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인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명확하고 뚜렷한 비전을 주십사고 기도를 했고, 그로 인해 동탄지역이라는 명확한 Target과 더불어 3가지의 세밀한 목적을 비전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Next Generation (다음 세대), Next Church (다음 교회), 그리고 Next Mission (다음 선교) 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되돌아보니, 최근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태어날 시대에 비교하면 사분의 일로 떨어졌습니다.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면 자연히 다음 세대들의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이 비전을 붙잡고 사역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주신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 내게 주신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영적인 단호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도전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전을 통해 승리까지 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영적 단호함입니다.
존경받는 어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의외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말씀하신 뜻을 깊이 새겨본 후에는 참으로 내공 있으신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개는 '상황'을 말하며, 기차는 '꿈, 비전'을 말합니다. 내게 무슨 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비전은 이루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세력들의 등장, 음모와 같은 도전 앞에서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느헤미야에게는 남다른 비전의 실행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와 같이 업신여김과 비웃음의 도전이 있었지만, 20절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과 같은 단호함이 있었습니다. 이 문장을 영어성경에서는 "Jerusaliam's none of your business" 라고 씌어 있습니다. 영어에서 상대방에게 not your business라고 표현할 때는 아주 단호할 때 사용합니다. 끼어들지 말라는 단호함입니다.
그럼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런 단호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선하신 하나님,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떠하든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사는 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는 대로 따라 사는 사람은 작은 고민이나 문제 앞에서도 '힘들다, 못해먹겠다, 죽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대로 생각한 대로 사는 사람은 어떤 환경 아래서도 '믿은 대로, 고백한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도전 하에서도 비전을 지키며 단호하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믿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윗의 삶 속에는 10년간의 광야생활도 있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가 한 고백이자 선포를 시편 57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6절부터 8절입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가 만약 사는 대로, 광야 생활에서 겪는 대로 생각했다면 필시 그는 포기하고 낙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고백함으로써, 그 광야를 극복하고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의 고백, 그 단호함이 그의 삶을 회복하게 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도, 목회자임에도 사는 대로, 문제 있는 대로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러자 나도 가끔 사는대로 살면서 절망할 때가 많았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시편 57편을 붙잡고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말씀이 시편 57편 1절과 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단호하게 붙잡은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다윗도 두려웠구나. 무서웠구나. 그래서 은혜를 간구했구나. 그리곤 생각과 믿음대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게서 여전히 두렵고 무서움이 잔존하고 있음을 보게 될지라도, 다윗이 그런 마음을 벗어나고자 고백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라도 고백하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의 눈을 들어 오늘도 주만 바라봅니다' 라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내 문제, 내 고민 보다 훨씬 큰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이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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