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20313_설교정리_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라 (룻 4:1~6)

서정원 (JELOME) 2022. 3. 14. 08:58

○ 말씀전문

[룻기 4장 1~6절]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 설교요약

그리스 시라쿠사 거리에는 동상이 하나 서있습니다.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 동상을 보고 처음에는 모두 웃는답니다. 그러다가 그 밑에 있는 글을 보고는 고개를 끄떡인다고 합니다. 그 동상의 모습은 앞머리에는 머리숱이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데다가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는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답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오늘 본문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은 나오미의 고엘 (기업 무를 자)에서 최우선권을 가진 친족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만난 보아스가 고엘의 선택권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메시아의 계보가 되어 성경에 기록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결국 성경의 기록에는 보아스가 올라가고 그는 이름조차 없는 아무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기억되지 못한 자라는 의미와 똑같습니다.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아무개라고 불린 이 사람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은...

 

1.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선권이 있는 그 아무개에게 보아스가 고엘 권을 행사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만약 행사하지 않겠다면 차순위인 자신이 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처음에는 흔케히 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의 고엘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고엘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며 보아스더러 가져가라 합니다. 이 배경에는 나이 많은 나오미가 곧 죽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식이 없는 나오미의 재산은 자기 것이 된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젊은 룻의 고엘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에, 그 룻은 젊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또 혹은 룻이 재혼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재산이 고스란히 그 자식의 것이 됨을 계산하고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라며 고엘권 행사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바라보며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선택한 그의 결정은 장차 일어날 수 있었던 놀라운 기회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과 22절에는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자, 그는 자기 소유를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재물로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고 떠나가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사람 역시 성경에서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조금 있고 머리가 조금 좋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눈 앞의 이익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얻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별로 남는게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 굴리지 않는 단순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산기 두드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분명하면 하나님도 내게 분명하십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이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가 고엘을 택하지 못해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었지만 하나님이 온전히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진정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엘이라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삶을 통해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정말 내 눈앞에 보이는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1절입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물 한 그릇이라도 베푼 작은 헌신조차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은, 내게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생각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시고 상 주시는 분임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는 정말 나를 믿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평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이번에는 쉬운 성경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놀라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이웃의 어려움 앞에서 신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비호감인 사람은 마찬가지입니다. 비호감인 사람은 책임져야 할 때, 혹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할 때 슬쩍 발을 빼는 사람입니다. 사사기 시대에는 이런 사람을 '신발을 벗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아무개라는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 신을 벗어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무르거나 교환을 확정할 때, 슬쩍 발을 빼고 책임을 피하는 사람은 신발을 벗어 그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본문 뒤에 나오는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부끄럽지만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발을 뺀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신명기 25장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고엘을 해주지 않고 신을 벗는 무책임한 사람에게 침을 밷고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고엘은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받는 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모욕을 당하는 부끄러운 자로 여겼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부끄러움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이 강연을 했는데, 자기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되며, 자기가 자주 가는 뷔페의 가격이 어떻게 되고, 오늘 입고 온 양복이 유명 백화점에서 얼마나 비싼 값을 주고 샀는지, 그리고 자기가 타고 온 승용차의 배기량이 얼마라는 등, 개척교회 목사들 앞에서 자랑삼아 얘기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목사도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일화도 있습니다. 추기경이 된 기념으로 성도들이 돈을 모아 캐딜락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기분좋게 타고 다니는데 어느날 한 수녀님이 "추기경님, 이런 고급차를 타고 다니시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안들리고 고약한 냄새도 안들리겠네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추기경님은 부끄러움을 깨닫고 평생 그 차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누가 깨닫게 해주면 금방 부끄러움을 깨닫고 고치는 사람, 그래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한 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