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11114_설교정리_너희 염려를 다 내게 맡기라 (벧전5:7, 빌4:6~7)

서정원 (JELOME) 2021. 11. 14. 17:34

○ 말씀전문

[베드로전서 5장 7절]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빌립보서 4장 6절~7절]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말씀요약

철학자 플라톤이 든 행복의 조건입니다.

첫째, 조금 부족한 듯 한 재산

둘째, 칭찬하기에 부족한 듯 한 용모

셋째, 자신 생각의 절반 정도에 미치는 명예

넷째,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사람에게는 지는 체력

다섯째,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을 수준의 말솜씨

우리는 무엇이든 완벽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들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기뻐하라 라는 말씀이 14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쓴 것은 로마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누구보다도 암울한 상황에 놓여 있던 그가 오히려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깊이 묵상해 봐야 할 참으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가을, 오랜 코로나로 지쳐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 바울의 도전에 부응하여 기쁨의 삶을 회복하려면...

 

1.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평화의 특징은 ① 환경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기쁨 속에 있다가도 환경이 나빠지면 금새 사라집니다. ② 자신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재산이 많으면 기뻐하다가도 돈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③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합니다. 이런 잣대로 보면 바울은 절대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만 뜨면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쇠창살이 전부였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뻐한 이유를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 라는 말 앞에 '주 안에서'라는 단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쇠창살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은 비록 감옥 속에 놓여 있지만 마음과 영혼만큼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친구 얘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친구 얘기입니다. 그 친구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삐삐가 애용되던 시절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삐삐를 곁에 두고 호출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휴대폰이 나오자 그 휴대폰을 이용해서, 방금 헤어지고 들어갔는데도 잘 들어갔는지 통화를 하고, 그리고 또 연락이 오지나 않을까 하며 아예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친구의 마음에는 온통 그 여자 친구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 그 여자 친구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안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 우리의 생각들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붙들고 사느냐에 의해 좌우됩니다. 걱정과 분노와 불만을 붙들고 살면 그것들과 더불어 살고 그것들이 주는 결과에 좌우되며 삽니다.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라는 단어를 '티크마'라고 합니다. 티크마는 '노끈'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노끈'은 '꽈바'라고 합니다. '꽈바'는 '서로 꼬아 한데 결합시키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이는 희망은 우리 삶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혼자 내버려두면 기쁨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금심 속에 빠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라는 노끈이 혼자로서는 근심과 염려의 근본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꽈여지게 될 때 전혀 다른 노끈이 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로 걱정과 염려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28절). 맡기면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본문 베드로전서 5장7절에서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라고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 책임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맡기 사람을 돌보시고 책임져주십니다.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돈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사업의 문제입니까? 그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겠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맡기십시오. 내가 붙들고 있으면 그 문제가 내 문제이지만, 주님께 맡기면 주님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야 기쁨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만을 바라보고 그 환경에 굴복하여 사는 사람이 전자이고, 상황과 환경이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섭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후자입니다. 바울은 후자의 사람이었습니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 성도님들은 늘 기도할 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앞서 붙입니다. 아마도 오랜 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을 해석하는 현명한 랜즈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울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4장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통상 힘들고 어려울 때 합니다. 감사가 없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을 해석하는 현명한 랜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감사의 비밀을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현재의 상황과 환경이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부여된 낙심과 좌절마저도 하나님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면 낙심 속에서, 실망하면 실망 속에서 불평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기쁨으로 그 선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지혜의 랜즈를 갖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