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10627_설교정리_회개, 죄를 이기는 능력

서정원 (JELOME) 2021. 6. 27. 12:32

○ 공동기도

①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잘 차단되고 백신의 안정적인 공급을 통해 국민들의 일상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② 요르단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에 은혜를 더하시고, 건강과 사역을 지켜주옵소서

③ 예수동행세미나 (7/3,10)의 모든 진행과정이 잘 준비되게 하시고, 주님의 일하심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 말씀본문

[예레미야 5장 24절~25절]

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요한일서 1장 9절]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설교요약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나오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큰 죄를 지었다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다른 한 여인은 큰 죄는 아니지만 자질구레한 잘못을 지으며 살아와 무거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각자 자기가 지은 만큼의 돌을 가져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큰 죄를 지었다고 했던 여인은 커다란 돌 하나를 힘겹게 가지고 왔으며, 자질구레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던 여인은 새 알 같은 조약돌들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 본 목사님은 그들에게 그 돌들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두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큰 돌을 가져왔던 여인은 다시 낑낑대기는 했지만 그 돌을 제자리로 갖다 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약돌들을 가져왔던 여인은 그 돌들 하나하나를 여기저기서 주어왔기에 어디로 갖다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 큰 돌 여인의 몫입니다. 반면에 이 조약돌 여인과 같은 모습이 지금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죄를 지으면서도 죄책감 없이 인생을 살아왔기에 회개 없는 삶을 살지는 않은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문득 회개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개하는 모습은 아마도 ① 겸손하게 꿇은 무릎, ② 깨어진 상한 심령, ③ 젖은 눈동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가장 멀리, 그리고 투명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지 싶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시대, 우리 중에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한 회개를 잊고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잃어버린 회개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1. 죄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막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은혜와 복을 듬뿍 받으며 사는 것 같은데, 내게는 왜 그런 은혜와 복이 주어지지 않고 힘들기만 한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늘 기쁘고 즐겁게 사는데, 나는 왜 기쁨이 없고, 우리 가정에는 웃음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복을 주고 누구에게는 복을 주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24절입니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든 때에 따라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주는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25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복을 막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허물과 죄라고 합니다. 허물은 도둑질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이웃 사랑이나 부모 공경, 하나님에 대한 사랑 등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복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1절과 2절에서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못함이 아닙니다. 귀가 나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강이 있음을 깨닫고 그 강을 해소해야만,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를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쟈니라는 아이가 삼촌으로부터 새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새총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 한 마리가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새총을 겨누어 그 오리를 쐈고 오리가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동생 셀리가 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다가 셀리에게 "셀리야, 할머니 그릇 닦는 것 좀 도와줄래?" 하자 셀리가 "할머니, 오늘 저녁 접시는 쟈니가 닦을거야" 하고는 형을 쳐다보면서 "형, 오리 알지?" 했습니다. 쟈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릇을 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할아버지가 쟈니와 셀리에게 낚시에 따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셀리는 오늘 그릇 닦는 순서라서 갈 수 없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셀리가 "할머니, 오늘 그릇도 쟈니가 닦을 거예요" 하며 쟈니를 돌아보았습니다. 쟈니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할머니를 찾아가서 죄송하다며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난 다 봐서 알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창가에 서 있다가 네가 한 일을 다 보았단다. 하지만 할머니는 널 너무도 사랑하기에 이미 다 용서했단다" 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기쁨을 잃은 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수에 묶여서 끌려가듯 살고 있는 모습, 무슨 일이든 내 탓 같이 여겨져서 암울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사슬을 끊고 살아가는 회복의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2. 회개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법이 회개입니다. 그럼 이 회개는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회개란 뉘우침, 혹은 후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는 죄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회개는 대상이 있지만 후회는 대상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을 후회만 했지 회개까지 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후회와 회개의 차이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이를 잘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면"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책에서도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만 바라보고 하는 회개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 것과 함께,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회개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까요? 왜 회개하면서 또 죄를 짓는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거하심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주님과의 교제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 회개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대상을 예수님으로 해야 함은, 내가 죄를 지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와 계신 예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식해야만 진정한 회개가 됩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인식한 사람이 다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난 후 깊이 회개 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왕이라면 남의 아내를 취하는 그 정도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철처히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 3절과 4절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주께 범죄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시편51편 10절부터 1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찬양이 즐겁지 않고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합당치 않는 일이 있다면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찬양과 예배와 신앙의 즐거움을 회복하시길 소망합니다.

 

3. 회개가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수단이 회개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장애물을 치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수준으로까지 가야합니다.

하지만 죄는 우리의 의지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첫째 의미는 죄 지은 사람을 끝까지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 말씀 속에는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죄를 짓지 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그 때마다 용서해 주겠다는 의미보다는 용서해 줄테니 실수를 회개하고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서커스 단원이 실수하여 떨어지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아래에 그물을 쳐줍니다. 그것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만,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최상의 곡예를 펼치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낙심하고 주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기대하십니다. 다시 일어서도록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확신을 갖고 회개하는 것이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길입니다. 진정한 회개, 그것이 우리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또 호세아 6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