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기도
①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며 시대적인 소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② 의료적으로 열악한 선교지에도 백신의 공급이 잘 이루어지고 선교지의 초석이 다시 세우지게 하옵소서
③ 우리 교회 비전을 위한 종교부지 4차 분납 (6/17)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게 하옵소서
○ 말씀전문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설교요약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미국 뉴욕의 911테러는 인간의 잔혹함을 낱낱이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된 비행기에서, 무너져 내리는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들로 깔려 죽어갔습니다. 그 죽어가는 와중에 가족들에게 남긴 메시지들이 우리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기도 했습니다.
브라이언 스위니가 부인에게 남긴 메시지입니다. "여보! 나 브라이언이야! 내가 탄 비행기가 피랍 됐어. 그런데 상황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아. 여보! 나 당신 사랑하는 것 알지? 당신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좋겠어. 만약 그렇게 안 되면 여보 인생을 즐겁게 살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나중에 봐! 꼭! 사랑해!"
베로니크 바워가 어머니에게 남긴 메시지입니다. "엄마! 이 건물이 불에 휩싸였어. 벽으로 막 연기가 들어오고 있어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엄마 사랑해 안녕!"
제르미글릭이 아내에게 남긴 메시지도 있습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우리 딸 에이미도 정말 사랑해. 그 애 좀 잘 돌봐 줘.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사랑해서 결혼했음에도,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사랑으로 낳은 자녀인데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에서 사랑이 매말라 있지는 않는지요?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이 시간입니다. 우리가 혹 사랑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그 사랑이 조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1. 사랑의 우선 순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 보다도 사랑이 1순위입니다.
유기성목사님이 [예수님의 사랑] 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제가 목회를 해 오면서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성경적 기준으로 교회의 임원 (제직)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제일로 여기셨는데 저는 그 사랑을 너무 가볍게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성수 잘 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봉사를 잘 하기에 중요한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자 애썼지만 이상하게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심사 숙고해서 세운 이들이 교회를 일으키기는커녕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된 것은 처음부터 임원을 세우는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1순위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꽨과리가 되고, 내가 방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올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1순위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이신 예수님이 내게 와서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1순위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한 자매가 가출하여 창녀촌으로 팔려 갔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좋은 한 형제를 만나,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그 창녀촌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되었고,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곳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다른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그녀의 과거를 아는 한 집사님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에 대한 소문이 서서히 교회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 이유를 알게 된 그들은, 교회가 창녀촌 보다도 못한 곳이라며, 숨기며 사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는 수면제를 나누어 먹고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라면 이들을 잘 품을 수 있었을까요?. 교회가 서는 데도 사랑이 1순위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지, 사랑이 1순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해 볼 일입니다. 사랑을 1순위로 하는 행복한 가정, 복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사랑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든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 하게 정의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제 은사님은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신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고 삶을 살아오면서 저는 사랑을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범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도관의 시각입니다. 교도관들은 아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나쁜 아이들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면회오는 어머니들의 시각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한결 같이 '내 착한 아이'라고 합니다. 착한 아이인데 친구를 잘못 사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적인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는 부분만을 바라보는 교도관의 인식과 전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각의 차이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부분으로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만약 부분으로 보셨다면, 우리들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볼 때 부분으로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건을 훔친 아이를 부분의 눈으로 보면 곧바로 경찰서로 끌고 가야 하지만, 너무도 배가 고파서 물건을 훔칠 수 밖에 없었던 그 아이의 형편 전체를 알게 되면 우리는 감히 그 아이를 경찰서로 끌고 갈 수가 없게 됩니다.
부부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부부 싸움이 되는 것도 상대가 보인 부분을 먼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만을 바라보기에 실망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아내나 남편의 흠을 그 부분만 바라보면 내 상처가 되지만, 전체를 바라보면 상대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전체가 사랑을 회복하게 합니다.
부분만 보고 평가하게 되면 우리는 평생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전체를 보게 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품을 수 있게 되고, 내 삶에 여백이 생기게 됩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고 사랑을 회복하여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사랑할 힘이 내게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사랑하려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를 영문 성경에서는 "Love comes from GOD"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기성목사님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예수님의 제자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람의 핵심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람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핵심입니다.
사랑의 사도이신 요한은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니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시기 전에 이 사람들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내가 아내나 자식을 사랑하기 전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내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자녀가 미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내를, 자녀를 언제든 사랑하게 됩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최덕규가 지은 '가시나무'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외롭고 또 괴로운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라는 소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출세, 내 욕심, 내 욕망이 가득 차서, 내 아내, 내 자녀가 내 속에 들어와 쉴 곳이 없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그 쉴 곳을 만드려면, 내 욕심, 내 자아를 내려놓고 예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아내가 보이고 내 자녀가 보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의 흑인대통령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인들이 사는 아프리카에 백인들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흑인 탄압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고, 넬슨 만델라 자신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번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종신형. 거기서 무슨 소망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기약도 없는 생활을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처음 시행한 것은 백인들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과거의 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반대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밀고 나갔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반 드 브렉이라는 백인 경찰관은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의 흑인 소년을 총으로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일, 8년 후 소년의 아버지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장작더미에서 태워 죽인 일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끔찍한 일을 차례로 당한 흑인 노부인에게 판사가 물었습니다. “반 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노부인이 말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반 드 브렉 씨가 그 장소로 가서 남편의 재를 모아줬으면 해요.” 그 경찰관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노부인은 추가 사항을 덧붙였습니다. “반 드 브렉 씨는 제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에게 줄 사랑이 아직 많습니다. 한 달에 두 번, 그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나는 반 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 주고 싶습니다.” 노부인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누군가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반 드 브렉은 그 찬양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감당치 못하고 졸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새 시대가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 흑인 노부인이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쁩니까?
당신은 오늘 아내와 자녀에게 후회 없는 사랑을 해주고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 교회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우선 순위 1로 두십시오.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보도록 하십시오.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가정, 당신의 교회, 당신의 삶이 후회 없고 행복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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