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10404_설교정리_오늘을 견디게 할 진짜 희망 (빌 3:10~12)

서정원 (JELOME) 2021. 4. 4. 13:03

○ 말씀전문

[빌립보서 3장 10~12절]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설교요약

리디머교회의 설립 목자이신 팀켈러 목사님은 췌장암 중에 집필한 [부활을 입다]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대표 절기 부활절의 풍경을 떠올려 보라. 교회에서 달걀을 나눠 주는 날? 사순절과 고난주간이라는 심적 부담감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환한 얼굴과 즐거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자유를 주는 연례 행사? 예수의 부활은 성경에 나오는 그저 놀라운 초자연적 기적일 뿐인가? 오늘의 내 삶, 신음하는 이 시대와는 별 상관없는 한낱 과거의 사건인가? 현대 기독교는 지금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오늘을 견디게 할 '잔짜 희망'이 절실한 세상에 내놓는 생명의 답! 예수 부활의 권능을 입는 것, 부활의 권능을 입고 다시 사는 것, 이보다 더 장엄하고 강력한 희망은 없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팀겔러의 지적을 겸허하게 되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권능을 입고 그 권능으로 사는 진짜 희망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입고 그 권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은...

 

1.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장 드러내는 성경의 말씀은 로마서 6장 3절과 4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도 죽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선포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지, 머릴 루스는 저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책에서 3가지로 요약해 주었습니다. ① 자아에 대해서 죽는 삶, ② 죄에 대해서 죽는 삶, 그리고 ③ 세상에 대해서 죽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이 남달랐던 점, 바울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의 인기, 세상의 평가, 세상의 재물, 세상의 권력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패션오브 크라이스트]의 감독 멜 깁슨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순도 100%인 복음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작품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 입니다. 그가 이 작품을 기획하고 스폰서를 구하려고 했을 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용이 너무 종교적이고,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어서 시청자들이 자막을 통해 봐야했기 때문에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사재를 털어서 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시작된 첫날, 수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어, 첫날의 상영만으로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인들까지도 이 영화를 보고 회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보고 가장 싫어하고 시기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한 유대인 기자가 물었습니다. "멜 깁슨, 당신은 정말 우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장본인들이라고 생각하시오? 당신의 견해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멜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분을 죽였습니다. 저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저의 죄 때문에 그분이 이런 수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 십자가 죽음과 함께 나도 죽었으며,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했다는 선명한 고백이 분명히 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권능을 입고 그 권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소망을 잃어버린 베드로는 낙향하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으로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21장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갈릴리 호수는 4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긴네렛, 게네사렛, 갈릴리, 디베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다시 찾은 그곳 이름을 굳이 디베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4개의 이름 중에서 디베랴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했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천국 열쇠는 준다고 했을 정도로 기뻐하셨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백을 유독 기뻐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고백이 있었던 장소와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고백한 그곳은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가이사랴는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부를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동상이 있고 다들 황제를 숭배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황제가 주는 돈, 권력, 명예로 가득한 그곳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좌절하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낙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디베랴 호수에 찾아온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또 다른 황제 논리가 숨쉬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며, 권력이 최고라는 유혹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이 혼탁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 고백을 하려면 부활하신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94장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찬송 하나라도, 그냥 좋아서 가사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삶에서 터져 나오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되돌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찬송에 진짜 내 마음이 들어 있다면 우리는 새롭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르는 찬송 속에, 예배 속에서 들은 말씀 속에, 진짜 내 마음이 들어있다면 우리는 수 백번의 설교를 듣고 감동 받는 것 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과의 새로운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부활하신 목적이 우리와 함께 밥먹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영성일기]에 보면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밥은 가족과 친구와만 먹습니다. 음식 규례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은 한 가족, 한 형제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와 친밀하신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친밀하신 분입니다. 함께 밥 먹고 동행하는 분입니다. 부활의 목적이 우리와 동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은 우리가 점검해 볼 핵심은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주님을 느끼고 경험하며 사는, 그 동행이 오늘 이 시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같이 걷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의 어두운 계단을
아들 동연이와 함께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동연이의 손을 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
아이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우리는 금세 집이 있는 8층에 다다랐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와 같이 좀 더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혼자서 짐을 들고 올라다닐 때 8층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아이와 같이 걷는 동안 8층은 너무 가까웠다.
하나님과 같이 걷는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과 같이 걸으면서
어느새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혼자 걸었으면 길고 지루했을지 모를 그 길의 고비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눈 추억들이 새겨져 있음에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
그분이 나와 동행해주시는 한,
주변의 어두움도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광야 어떤 사막을 홀로 걸어가고 있다 해도
나는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 주님이 바로 내 곁에서 같이 걷고 계신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선명해질 때, 결코 혼자가 아님을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입고 그 권능으로 살아가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을 고백하여 복된 부활절을 맞이하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