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 설교요약
때와 관계되는 단어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에 나오는 이름인데, 크로노스는 절대적인 시간의 신입니다. 즉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시간, 달력에 맞춰 넘어가고 시계의 침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지배합니다. 이 절대적인 시간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흘러가 우리를 늙게 하고 끝내 죽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입니다. 이 시간은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나타내는데, 게으른 사람에게 1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의 1분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대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이므로 같은 양의 물리적 시간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두 배 혹은 세 배까지도 늘릴 수 있습니다.
고정순 목사님의 [카이로스]라는 책에서 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시공간이 주어져 있는데, 카이로스 공간이 크로노스 공간을 터치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을 하나님의 터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심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이 카이로스의 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로노스를 살고 있던 고넬료에게 카이로스의 하나님이 터치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의 시기에 우리도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겨두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터치를 구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나의 삶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터치가 있었던 것은, 그가 살아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모습을 본문의 1절과 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① 경건하고, ② 하나님을 경외하며, ③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였고, ④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구제한다는 말은 "엘레에모쉬네" 인데 "마음까지 담고 구제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가 따뜻한 마음으로 섬기고 구제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삶이 깨어있고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는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입술은 살아있으나 삶은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후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간다는 것을 아신 한 집사님이 가기 전에 꼭 자기 가게를 들렀다가 가라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출발하면서 집사님의 가게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제게 장미꽃 한다발과 봉투 하나를 주었습니다. 처음엔 제게 주는 줄 알았는데, 제가 말씀을 전하러 가는 그 교회 목사님께 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자신의 가게도 힘들지만 상가 건물에 개척을 하신 그 목사님이 얼마나 어렵겠냐며 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봉투에 적혀있는 메시지가 가슴을 울리게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섬김이어서 감사합니다". 꽃다발과 봉투를 전하는 제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설교 말씀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전한 것 같았습니다. 삶이 살아있는 이 집사님과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카이로스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가진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옥합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옥합을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옥합을 가지고만 있으면 그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그 옥합을 깨뜨리는 자 만이 옥합 속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삶이 살아있는 사람은 내 인생에 주어진 물질의 은혜, 건강의 은혜, 사랑의 은혜를 흘러보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2.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벗겨져야 합니다.
본문에는 고넬료 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사도이지만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부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보자기를 내려 보이셨습니다. 그 보자기 속에는 유대인들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하자 베드로는 가증한 것이라서 먹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왜 가증스럽다 하느냐고 질책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편견과 신입견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는 이방선교에 눈을 뜨게 됩니다. 45절과 47절입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우리 삶 가운데서도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에 말썽꾸러기 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저 아이는 안 된다"며 꼬리표를 달고 그 아이를 대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오신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아이를 눈여겨 보고는 초등학교 5학년인 그 아이의 생활기록부를 살펴 보았습니다. 1학년 "착한 아이입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나 가정 환경이 불우한 편입니다". 2학년 "조용한 아이입니다. 조금 폐쇄적입니다. 어머니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3학년 "학업 성취도가 떨어집니다. 금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4학년 "아버지는 가출했고, 현재 이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극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아이에게 사랑으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해 성탄절에 아이들이 성탄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이 아이는 쓰다가 찌꺼기만 남은 향수와 이미테이션 목걸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놀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향수를 뿌리며, "선생님은 이 향수가 제일 좋다" 라고 했으며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너무 예쁘고 좋다"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들이 그 아이 엄마의 유품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6년이 흘렀습니다. 아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톰슨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을 가장 먼저 선생님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저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나고 다시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저 과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햇습니다" 다시 4년이 지나고 편지가 또 왔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멋지죠. 이제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어머니가 안 계신 것을 알고 계시죠.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제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주세요. 선생님을 저에게 어머니이십니다". 주일학교 한 선생님이 딱지와 꼬리표를 떼어내자 한 아이의 미래, 내일이 새롭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 가족, 한 공동체의 새로운 내일을 만들려면 내 눈의 편견과 선입견의 비늘을 걷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터치가 우리에게 임하려면 저 사람은 안 된다는 선입견을 떼어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름 아닌 "이튿날"입니다. 9절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라". 그리고 23절과 24절입니다.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굳이 이튿날을 지정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재철 목사님의 [사도행전 속으로]에 잘 해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계속해서 역사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열납하시고 그에게 욥바에 체류 중인 베드로를 청하라 명하시던 날, 그날 당일에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하루에 그치지 않고 이튿날에도, 이튿날의 이튿날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우리의 이튿날을, 다시 말해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의 심령에 각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코로나 사태 속에서 우리는 내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 이 단어를 통해, 오늘도 그리고 이튿날인 내일도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_설교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25_설교정리_ACTS29 (20)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열리는 믿음의 기도를 하라 (행12:1-5) (0) | 2020.10.25 |
---|---|
201018_설교정리_ACTS29 (19) 팬이 아닌 제자의 삶을 살라 (행 11:19~26) (0) | 2020.10.18 |
201004_설교정리_ACTS29 (17)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되라 (행 9:1-6) (0) | 2020.10.04 |
200927_설교정리_ACTS29 (16) Way Maker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행 8:1~6) (0) | 2020.09.27 |
200920_설교정리_ACTS29 ⑮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라 (행 7:17~22) (0) | 2020.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