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참고자료

전도폭발훈련_예화 모음

서정원 (JELOME) 2019. 11. 1. 16:34

단순한 지식적 믿음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 것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고 있지요. 그러나 그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시리라고는 믿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단순한 지식적인 믿음은 구원 받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원 받는 믿음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시적 현세적 믿음이지요.

일시적, 현세적 믿음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들이 건강문제나 재정문제, 자녀문제와 같은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일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잠시 있다 지나갈 이 세상의 일들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시적, 현세적 믿음은 구원 받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거지의 손 예화
믿음은 어떤 왕이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민 거지의 손과도 같습니다. 저는 수년 전에 깨끗하지 못하고 자격 없는 손을 내밀어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천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요. 물론 지금도 자격은 없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지요.

죄를 기록한 책 예화
(왼손으로 책을 들어올리며) 이것이 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둔 책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왼손에 든 책표지를 오른손으로 가리키며) 여기에는 선한 행위도 기록되어 있고 또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언젠가 이 책이 하나님 앞에 (왼손에 든 책을 오른손으로 펼치며)펼쳐지고 제가 행한 대로 (펼친 책을 오른손으로 두드리며) 심판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책을 든 왼손을 올리며)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 책에 기록된 저의 죄가 (오른손으로 책을 가리키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책을 들고 있는 왼손의 손가락과 손등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저를 사랑하시지만 저의 (오른손으로 왼손의 책을 가리키며) 죄는 미워하셔서 반드시 벌하셔야만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펴서 위로 들어올리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들었던 오른손을 책을 든 왼손 높이까지 천천히 내리며)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책을 든 왼손을 수평으로 두 세 번 왼쪽으로 움직이며)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책을 든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그에게 (분명한 동작으로 왼손의 책을 오른손으로 소리나게 옮겨 놓으면서) 담당 시키셨도다!”(사53: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시선을 왼손에 두며) 저의 모든 죄가 (시선을 오른손으로 옮기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오른손으로 책을 가리키며)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범죄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다 갚아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천국의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승천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 인간이 처한 궁지의 해결책
우리에게는 인간이 처한 궁지를 해결할 공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하나님의 공의를 더하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답밖에는 안나온다. 우리는 마땅히 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답이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갚으셔야 했던 것이다.

죄의 정의
흔히 죄라고 하면 우리는 단지 강도나 살인, 도적질, 간음 등을 염두에 둘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화를 내는 등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등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또한 죄는 행동으로만 짓는 것이 아니라 교만, 정욕, 미움, 탐심, 시기, 질투, 거짓말 등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말로도 짓게 되지요.

테텔레스타이 예화
범죄한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갚아야 할 모든 죄값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다 갚아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다 이루었다!"(요19:3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원문에 나오는 헬라말 "테텔레스타이!"를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빚이 완불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값은 우리가 당해야 할 사망이었습니다. 그 죄값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테텔레스타이!" 곧 완불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 완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값없이 천국의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 죄를 담당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천국의 처소를 마련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천국 영생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천국문을 여는 열쇠 예화
믿음은 천국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여기 열쇠꾸러미가 있는데(열쇠꾸러미를 보여주며) 이 열쇠들은 다소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열쇠들 중에서 저희 집 현관문을 여는 열쇠는 이것 한 가지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 문을 여는 바른 열쇠는 구원 얻는 참 믿음입니다. 그러나 비슷하지만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이 있어요.

믿음 - 가치를 결정해 주는 대상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믿음 그 자체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믿음을 가지라!" 고 말을 한다. 그러나 믿음이 참 가치를 지니려면 그 믿음의 대상이 가치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단순히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 무엇을 믿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을 믿는 믿음은 가치가 없다. 그런 믿음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자기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전폭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브레이크 파이프가 파손되어 있으면 아무리 믿어도 차를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밤에 자다가 두통이 심해서 깨어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약상자를 찾아 두통약으로 생각되는 알약을 믿음으로 먹었는데 잘못하여 극약을 먹었다면 사람들이 그의 비문에 "여기 아무개가 믿음으로 죽어 잠들다." 라고 새겨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전혀 믿을 가치가 없는 대상을 믿은 헛된 믿음이다. 한때 미국에서 수많은 임신부들이 임신 기간 중에 자기 몸을 좀더 편안하게 해줄 것으로 믿고 틸리도마이드(thalidomide:수면,안정제의 일종으로 임신부가 복용할 경우 태아이게 부작용을 일으켜 기형아를 출산하게 될 우려가 있다: 역자 주) 라는 신비한 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기형아의 출산을 막아주지 못했다. 믿음이 어떤 가치를 지니려면 가치있는 대상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을 생각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고 의지할 참 신뢰의 대상이 되신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그밖에 다른 대상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친구의 선물 예화
만일 선생님의 친한 친구가 선생님을 위해서 값진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선생님이 그 선물 값을 지불하려 한다면 친구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행동이 되겠습니까? 선물은 값없이 받아야만 합니다.
단 한 푼이라도 지불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지요. 천국의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선 이 천국을 선물로 주셔야만 할까요?

선행 - 친구의 선물
어느 유명한 가구 제조업자가 친구 하나를 아주 좋아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자기 친구에게 아주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가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친구 몰래 자기 돈을 다 긁어 모았다. 자기 자식에게는 남들처럼 못해 주었으면서도 친구를 위해서는 그가 이제까지 저축해 두었던 돈을 찾아오고 가진 재산을 다 팔고 주식과 채권을 현금으로 바꾸어 온 세상을 다니며 돈으로 살 수 있는 목재로서는 최상품을 구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가구공장에는 말할 수 없이 값진 목재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최고급 탁자를 만들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였다. 그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몸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일을 계속 하였다. 드디어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을 하고 구멍을 파고 풀질을 해서 탁자를 맞춘 다음 사포로 문질러서 곱게 칠을 하고는 몇 시간을 걸려서 광을 내었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천을 가지고 깨끗이 닦아서 손질을 끝냈다. 다음 날 그는 자기가 정성을 들여 만든 탁자에 천을 덮어서 그의 조수들에게 들려 가지고 친구 집 문 앞에 이르렀다. 친구는 반갑게 맞아들였다. 친구 집에 들어간 가구 제조업자는 덮었던 천을 벗기고 자기가 선물로 가져 온 탁자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값으로는 칠 수 없는 소중한 가구였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탁자를 본 친구는 냅다 달려가서 사포 조각을 가져오더니 그 탁자를 향해서 덤벼드는 것이었다. 전문가인 가구 제조업자는 깜짝 놀라 막아서며 "그건 완제품이야, 이 사람아!" 하고 말했다.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값으로는 칠 수 없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셨다.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그가 이루신 우리의 구원은 완제품이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단 한가지라도 덧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격이 없으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선물에 우리가 어떤 손질을 하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을 거절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선행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의 선행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 탁자를 눈에 띄는 곳에 두어서 보는 사람마다 그것을 손수 만들어서 값없이 선물로 준 사람의 놀라운 기술과 정성과 후의에 대해 찬사를 돌리게 하듯이 값없이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을 만인에게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이것이 분명히 실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행과 경건 생활의 동기 예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해도 선행과 경건생활에 힘써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에게 천국을 값없이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썩은 계란이 들어간 요리 예화
우리가 싱싱한 계란 다섯개에 썩은 계란 하나를 섞어서 요리하여 손님에게 대접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들은 선하다고 생각할 것들이 많이 들어 있을지 모르나 실상은 부패한 생각과 행위로 가득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리라고 기대할 수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선행으로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은 언제든지 그에게 완전히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이 표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이나 저나 또 어느 누구라도 왜 행위를 가지고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가를 이해하시겠지요?

은행 강도 예화
어떤 무장 강도가 은행을 털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강도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돈도 다 돌려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사가 그 강도를 풀어준다면 그를 공의로운 판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판사도 법의 기준 때문에 범법자를 벌해야 한다면 하물며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 죄를 벌하셔야만 할까요? 성경이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리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자 예화
전 :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생님은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이 의자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죠?
대 : 예
전 : 제가 여기 앉으면 편히 쉴 수 있다는 사실도 믿으시죠?
대 : 예
전 : 그러나 아주 단순한 이유로 저는 지금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 의자 위에 앉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이 의자를 예수님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한동안 저는 이 의자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제가 이 의자에 앉으면 편히 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건강문제, 재정문제, 자녀문제 등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그 문제들만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저의 구원을 위해서 는 여전히 제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피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저의 구원을 위해 이 모든 문제를 안은 채 제 자신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의자에 앉는다. 잠깐 여유를 가진다) 비로소 저는 천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얼마나 평안하고 기뻤는지 몰라요.
전 :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은 천국에 들어갈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성실히 살았고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대 : 예
전 : 그 대답을 할 때 누가 성실히 살고 또 누가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했다는 말씀 인가요?
대 : 제가요
전 : 그렇다면 선생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실제로 누구를 믿고 있었나요?
대 : 그러고 보니 나 자신이었네요.
전 : 그러나 이제 천국의 선물을 받으려면 신뢰의 대상을 선생님 자신으로부터 예수님 께로 옮기셔야만 합니다

인간의 능력 한계 - 넓이 뛰기
여기 이 의자와 탁자를 엄청나게 깊은 협곡 양편에 깍아지른듯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절벽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두 절벽 사이의 넓이는 100m라고 해두자. 이제 협곡 이편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또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고 하자.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협곡 저편으로 건너가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만일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할 경우에는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들은 넓이 뛰기를 해서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건너가야만 하게 되어 있다. 현재까지 수립된 넓이 뛰기 세계 기록은 과연 얼마인지 아는가? 고작해야 8.4m에서 9m 사이일 뿐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서 100m 넓이의 협곡을 건너뛸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도 이처럼 넓은 협곡을 건너뛸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6m 이상 뛸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불과 몇 미터밖에는 못뛸 것이다. 불구자들은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저편까지 건너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저편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 것이다.
인간의 영적인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깊은 협곡 혹은 구렁이 끼어 있다. 사람들은 그 협곡을 건너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십계명도 지키고 고의로 남을 해치지 않고 가능한 한 협곡 이편에서 저편으로 멀리 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 자신의 과거 생활이었다. 그것은 저자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멀리 뛰려고 애를 쓴 생활이었다! 저자는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도 더 멀리 뛸 수 있다는 데에서 위로를 얻고 있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가장 멀리 뛰는 사람을 받아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저자는 아무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선을 다한 사람을 받아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그의 표준을 낮추어 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례식 채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체 인간의 능력에 비례해서 채점을 하지는 않으신다! 저자는 과거의 생각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표준, 곧 완전의 표준을 갖고 계실 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순간적으로 저자는 저자만큼 선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내가 무시했던 사람들도 결코 저자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얼마나 선하든지 간에 우리 앞에 가로놓인 협곡을 건너뛸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다 동일한 영원의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만큼 선하게 되지 않는다면 모두 다 지옥에 갈 것이다. 우리가 다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협곡을 건너갈 수가 없다.

인간의 능력 한계 - 민족의 혈통
우리가 만일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간다면 우선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우고 또 그 나라 사람들의 관습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 나라에 정착하여 불편 없이 살아가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말과 관습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까지도 철저히 익혀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얼굴 표정도, 몸짓도, 옷 입은 것도 그 나라 사람들과 같아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혈통마저 같아질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우리 자신이 지닌 민족의 혈통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말을 하고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옷을 입을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단체에 가입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을 부르고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는 죄에 빠진 인류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난 죄인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외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 사실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한국인이 되듯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민족의 혈통을 받고 또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있다. 거듭난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한다.

인간의 능력 한계 - 탱자나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내적인 능력이 없다. 어떤 사람의 집 마당가에 탱자나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탱자나무는 고작해야 시디신 탱자를 맺는다. 그런데 만일 그 집 주인이 귤을 키우고 싶은 나머지 마당가의 탱자나무에서 신탱자를 다 따내고 그 자리에 달콤하고 즙이 많은 귤들을 가져다가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잠시 동안은 그 탱자나무에 동네에서 가장 맛이 좋은 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귤"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귤들을 매달아 놓은 탱자나무일 뿐이다. 우리가 나무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시디신 탱자와도 같다. 우리는 자주 그 본성을 싫어하여 그것을 개선할 결심을 한다. 우리는 그 시디신 인간 본성의 열매들을 다 내버리려고 온갖 애를 쓴다. 어떤 사람은 술을 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조심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관계와 사업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은 탱자를 따내고 그 자리에 귤을 매달아 두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기른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원천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결심과 개선의 노력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탱자나무를 귤나무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품이 필요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 유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만삭이 거의 다 되어 유산을 한 어머니와 태아 사이의 관계와도 같다. 복중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나서 함께 지낼 날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생리 구조에 이상이 생겨서 어머니의 생리 구조에 실제로 역행하는 현상이 일어나 유산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화를 초래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내어 쫓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완전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 음이 맞지 않는 악기
어떤 음악회에서 관현악단이 연주를 하는데 악기 하나가 음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지휘자가 관현악단 전체를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이 맞지 않는 악기는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음이 맞지 않는 악기와도 같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우리는 불의하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우리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나 우리는 죄로 가득 차 있다. 관현악단이 온전한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음이 맞지 않는 악기를 내보내야 하듯이 자기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도 죄 때문에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인간을 내어 보내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죄인과도 교제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그는 절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 아레오바고의 재판관
그리이스(희랍)의 아테네에있는 아레오바고의 재판관은 얼마나 공정한 재판을 베풀었던지 그의 불의한 처사를 지적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판결은 항상 공명정대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더 공명정대하겠는가!

하나님의 자비 - 토마스 후커의 임종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 - 1647,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목사로서 1633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보스톤에 이민 온 후 1636년에는 현재 예일 대학이 있는 커넥티커트 주의 뉴 헤이븐에 재정착하였고 초기 미국의 교계와 정계의 지도자로서 큰 몫을 담당하였다: 역자 주)의 임종시에 그의 친구 하나가 말하기를 "자네는 이제 수고의 대가를 받으러 가는구만" 하였다. 토마스 후커는 겸손히 대답하기를 "아닐세, 하나님의 자비를 받으러 간다네"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할 뿐이다. 자비를 얻지 못하면 잃어버린 자가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안겨준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는 우리에게 천국을 안겨준다.
1860년 어느날 미국의 나이애가라 폭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줄타기의 명수 블론딘(Blondin)이 폭포 위로 매어 놓은 줄을 타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론딘은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위로 50m 정도의 높이에 300m 정도의 밧줄을 매어 놓고 수도 없이 건너다닌 경력이 있었다. 이날은 블론딘이 군중을 향해서 자기가 사람 하나를 데리고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불론딘의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 그는 어떤 사람 앞에 다가가서 그를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겠다고 제의했다. 그 사람은 불론딘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식적인 동의나 설사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충분치 못하다. 거기에는 힘이 아닌 신뢰가 따라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잊혀진 독생자
이것은 전도대상자가 복음의 내용을 다 듣고 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대해서 주저하는 빛을 보일 경우 하나의 강력한 예화로 사용할 수가 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총을 빼어 든 경찰이 뛰어 들어와서 제 손에 수갑을 채워 가지고 경찰서 유치장으로 체포해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겠죠. 또 제가 여러 건의 살인과 은행 강도 혐의로 심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면 더욱더 놀라시겠죠. 제가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유죄로 확정되고 결국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정말 놀라시겠죠. 그러나 선생님은 저를 잘 알고 있고 또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저를 돕기 위해서 뭔가 조처를 취하실 거예요.
"선생이 판사에게 가서 '제자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친구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겠어요' 하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판사는 대답하기를 '이 범인은 여러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당신의 목숨으로는 충분치가 못하오. 하지만 당신 아이의 목숨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이겠소. 당신 아이의 목숨이라면 충분한 희생이 될 것이요' 했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집에 돌아와서 고민에 빠졌어요. 선생님에게는 철부지 어린 딸 하나밖에 없다고 해보세요. 선생님은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할 수 없이 번민하실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를 선생님 몸처럼 사랑한다면 결국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실 거예요. 드디어 선생님은 사랑스러운 외동딸을 데리고 사형장에 갔어요. 사형 집행관은 선생님에게 '당신이 직접 형을 집행하시오. 당신이 직접 아이의 손발을 묶어 교수대 위에 세우고 얼굴을 가린 다음 밧줄의 고리를 아이의 목에 걸고 손잡이를 잡아 당기시오' 하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딸의 손발을 묶기 시작했어요. 딸은 애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쳐다보며 '엄마, 왜 나를 버리시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메어지는 듯한 가슴을 안고 딸의 얼굴을 가리우고 밧줄을 목에 건 다음 손잡이를 잡아당겼어요. 그처럼 사랑스럽던 외동딸이 죄 없이 교수대에 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갔어요. 사형 집행관은 선생님이 저를 위해서 한 일을 저에게 알려 주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제 목숨을 대신해서 죄 없는 외동딸을 희생시키셨기 때문에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집에 돌아왔어요.
"며칠 뒤에 선생님이 어떤 음식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마침 저도 그 음식점에 들어가서 다른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와 계신 것을 보지 못한 채 선생님 바로 뒤에 있는 칸막이 방에 들어갔어요. 선생님은 식사 도중에 제 친구가 저에게 하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듣게 되었어요. '신문에 보니까 자네 사형 언도를 받아 교수형을 당하게 되어 있던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해서 풀려나게 되었나?' 이때 선생님은 제 대답을 듣고 깝짝 놀셨어요. '아, 이건 그 사람들의 큰 실수였어. 그 사람들이 내 과거에 대한 기록을 들춰보더니만 그래도 내가 정말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나봐. 내가 죽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또 내가 털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은행도 많았거든. 뭐, 어떤 은행에다가는 내가 저금까지 해뒀는걸! 또 수년 전에는 길 건너는 할머니를 여러 번이나 도와준 적도 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내 과거 생활 전체를 저울질 해보더니 석방시켜 주기로 결정을 했어. 그래서 이렇게 풀려나게 된 거야.'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을 때 선생님의 마음 속에는 교수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숨져간 딸의 모습이 선히 떠오를 거예요. 제가 이렇게 살아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를 대신해서 죄 없이 죽어 무덤에 묻힌 선생님의 외동딸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그처럼 엉뚱한 말을 한다면 선생님은 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겠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만일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 선생님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고 오직 선생님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신다면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느끼실 거예요. 주일학교 1학년 학생 하나가 요한복음3:16을 암송하는데 약간 혼동을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잊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것이었어요. 그 학생은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하루 세 번의 죄와 예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루에 열 번이나 다섯 번, 아니 단지 세 번만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이런 사람은 걸어 다니는 천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에 세 번이면 일년에 천 번 이상 90평생을 산다면 9만 번 이상의 죄를 짓게 되지요. 이처럼 9만 번 이상의 범죄기록을 가진 상습범이 형사법정에 선다면 과연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이 세상에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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