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자 (초청 목사)
고창현목사 : 토렌스제일교회
○ 말씀전문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설교요약
김현승 시인의 '연(鉛)'이란 시가 있습니다. 한자의 '납' 연자를 사용한 시입니다.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있나 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 부다
나는 내 영혼 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켰나 부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도 무거운 존재라며 '나는 나의 짐이다'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버겁고 무겁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내가 싫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발걸음이 무겁고 버거워지면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큰 자괴감이나 자기 혐오에 빠지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나같은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싶을 때, 더 자기가 싫어집니다. 심한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살 의미가 없다고 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때에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야 할지를 알아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특히 자기애가 강한 사람, 삶에 열정이 강한 사람인,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얘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잡혀 갔을 때,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전에 그것을 얘기 했을 때,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 했던 자신이 결국은 3번이나 부인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런 자기 상실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홀로 갈리리 호수로 돌아가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짐이 되었고, 자기 자신이 싫어서 과거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갈릴리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열정을 회복할 지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는 회복의 방법을 우리 것으로 삼아, 우리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에 이 비법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내가 싫어질 때 어떻게 해야 하나'는...
1. 자신을 주님의 사랑으로 규정하십시오
베드로가 자신이 싫어 죽겠는데, 그래서 숨어서 살고 싶은데, 에수님이 자꾸만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 깊이 세워져 있는 자기혐오감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왜 네가 나를 부인했느냐' 라고 질책하면서 다가오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를 배신할 수 있냐' 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며 엉뚱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같은 질문, 'Do you love me'를 3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 물음이 계속되자 베드로의 마음엔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음을 다시 상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질문에는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라며 변함없는 사랑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너, 아빠 사랑해?" 라고 묻곤 합니다. 그 질문에는 '아빠는 너를 무척 사랑하고 있는데' 라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까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식사까지 손수 준비해 두신 것 또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싫고, 내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느냐 라고 낙심해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기혐오에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럼에도 난 여전히 널 사랑한다'고 마음을 보여주신 그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도 찾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할 때만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되어 있을 때, 그때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너 스스로를 참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도, 나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에게 주기까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로 자신을 확고히 규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확고한 규정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자기 혐오로부터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2. 자신을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새롭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여전히 자기를 사랑해 주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갈릴리를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가겠다 하기에는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용기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먹이고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명확히 해주셨습니다.
21세기 석학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인터뷰에서 '당신이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살고 있을 때를 보면, 거의 항상 당신이 인생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내 삶이 싫어지지 않을 때, 내 삶이 화평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는 내가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 대한 책임, 내 가정에 대한 책임,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이 바로 사명입니다.
남이 좋다고 해서 따라 살다 보면, 사명없는 삶, 의미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곧 자신이 싫어지는 때가 찾아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것이 나를 끝까지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루어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가 싫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 사명을 인식해야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습니다. 사명을 붙잡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 혐오로부터 온전히 탈출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곧 블렛싱 축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사랑을 확정하고, 이웃 사랑의 사명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주변 영혼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아름다운 사명을 다시 단단히 해서, 삶에 열정을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에 맡기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를 자기 혐오로부터 끌어내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용기를 얻었고,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열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싫어질 때'에 놓였다가 그것을 치유받고 극복했습니다. 이제 부여받은 사명을 붙잡고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다시 한번 실족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해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요한이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할 때, 그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던 제자였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비교의식을 느꼈습니다.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저 제자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절) 소위 Non your business라고 말합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이 갈 길이 있고 넌 네가 갈 길이 있다. 너는 네 갈 길만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짬뽕이 자장면을 견제할 필요도 없고 자장면이 짬뽕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장면은 자장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찾는 사람들이 있으면 됩니다. 짬뽕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하고 견제하면 자기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각자의 맛에 충실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하라 하신 그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남과 비교하게 되면, 또 불필요하게 나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그런 자기 혐오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기를 세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도망친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회복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도 중요하지만 회복의 은혜도 있습니다. 구원받고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회복의 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 회복의 은혜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은혜가 끝까지 가는 결실을 맺습니다. 잠시 다시 흔들렸지만 베드로는 곧 그 회복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똑같이 매달려 죽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회복된 그의 회복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비교심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순간적으로 비교감이 생기더라도 그 비교가 독약임을 알고 빨리 탈피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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