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설교요약
19세기 설교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매일 일곱 가지 점검 리스트로 자신을 점검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7가지 점검 리스트는
① 기도했는가?
②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는가?
③ 감사가 있었는가?
④ 욕심을 내지 않았는가?
⑤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⑥ 내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느꼈는가?
⑦ 오늘 나의 삶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하나 하나가 의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 질문에 묻고 대답해 보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지난해 년초부터 매일 아침 영성일기를 적어오고 있습니다. 그 일기 덕분에 많이 달라진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기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동행해 온 결과라고 믿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줄 믿습니다. 매일 아침의 QT로, 성경통독으로, 영성일기로...
어떤 방법이 옳다는 정답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면 좋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1.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동행하기 어렵습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이 내가 가진 목적과 동일해야만 동행하게 됩니다. 일본여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유럽여행 비행기를 타지는 않습니다. 유럽여행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미여행 계획을 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가진 배우자를 찾아 인생길을 동행합니다. 이처럼 신앙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우리를 이끌고 가실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만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밥을 먹을 만큼 친밀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어진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계시록 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자기들이 부자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자기들을 판단하고, 실상은 마음이 곤고하고 심령이 가난하고 부끄러울 정도로 벌거벗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못하고,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세계 최대의 순복음교회가 우리 나라에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 침례교회가 우리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바로 요한계시록 3장 17절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 행여 이런 모습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아예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오직 이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해 오신 것에 더하여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하려는 목적도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그것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메시지성경'을 보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They can have real and eternal life, more and better life than they ever dreamed of"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구원받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참맛이구나 하는 풍성함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 청년이 영국 여행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여객선 승선권을 구매했습니다. 표를 사고 나니 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객선을 타고 건너가는데 2~3주가 걸리기 때문에 그 청년은 남은 돈으로 3주 동안 먹을 치즈와 비스켓을 잔뜩 샀습니다. 이제 가진 돈은 바닥이 났습니다. 배 위에는 크고 맛있는 식당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음식들을 즐길 때 그는 뱃머리 구석에 앉아, 가지고 온 치즈와 비스켓으로 굶주림을 떼웠습니다. 식당으로 부터 풍겨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참으며 고통스런 여행을 했습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여 하선을 하려는데, 여객선 직원이 다가와서 '한끼도 식사를 하시지 않던데, 혹시 여행 중에 불쾌했거나 음식이 맘에 들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닙니다. 아무 것도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뱃삯을 지불할 돈밖에 없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직원이 "선생님, 식사는 배삯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데요"
우리의 삶도, 주님이 풍성함을 누리도록 해주셨는데도, 구경만 하면서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주님이 오신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기억하면, 우리는 그 분이 주신 삶을 풍성히 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2. 동행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이 동행하려면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평소 원수같이 지내던 사람과 같이 여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가득한 채로 평생을 부부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고역입니다. 함께 여행하거나 함께 동행하려면 그 동행에 장애물이 되는 것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지 못하는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엠마오를 향해 가는 두 동행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16절인 오늘 말씀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이 곁에서 같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합니다.
그럼 그들은 왜 눈이 가리어져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3가지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① 현재의 일의 염려와 걱정, ② 말씀에 대한 불신, ③ 영적인 눈이 닫혀있음' 입니다. 우리는 내 주변의 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앞서 주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걱정에 빠져 있으면 곁에 사람이 있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세상 일에 너무 빠져 있으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동행의 장애물이 됩니다. 말씀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이 동행하신다고 수없이 듣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을 갖고 날을 보냅니다. 지금 주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면 주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이 불신도 주님과의 동행에 큰 장애물이 됩니다. 눈이 가리어지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를 향해 가는 것을 보면 그들은 봉사가 아니라 눈이 떠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눈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영적 눈이 떠져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 눈이 가리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가리어지면 주님과의 동행에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 눈을 뜨도록 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이 눈을 떠도록 영적 처방을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진짜 신앙을 가졌는지 금을 사서 연단하듯 너희 자신을 연단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수치스러운 부분을 알기 위해 흰 옷을 사서 입어보라 하셨습니다. 진짜 봐야 할 것을 볼 수 있도록 안약을 사서 눈에 넣어 보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행여 우리가, 주일날 성경책 하나 들고 교회 왔다가 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주님과 동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좋은 군사는 훈련을 통해 길러지듯 좋은 그리스도인도 영적 훈련을 통해 길러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폭발훈련, 중보기도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장애물을 걷어내는 좋은 수단이 된다고 믿습니다. 동행의 장애물을 걷어내고 주님과 즐겁게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동행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적령기를 넘기고도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배우자를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망설임, 즉 애인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차일 피일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데도 그 방법을 알아야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양과 목자로 비유해서 동행할 때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려줍니다.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양은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가장 중요한 Key는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부부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입니다. 잘 생겼다고, 돈이 많다고 좋은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이 잘 되어야 평생 화목한 부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My sheep listen to my voice. 라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신학교 초기에 아버지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해서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어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야만 흔들리지 않고 목회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홀로 산에 올라 "주님, 한번만 딱 한번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면 제가 흔들리지 않고 가겠습니다. 한번만 들려주세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산을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던 어느날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 내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육성을 들으려는 내 방법이 잘못임을 에베소서 3장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3장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새로운 세계가 열림을 경험했습니다. 내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굳이 육성으로 말씀하실 필요가 있나? 마음으로 하시는 것을 믿으면 된다. 그 마음으로 주시는 말씀이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나와 소통하려고 하시는데, 정작 나는 육성으로 들으려 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통로를 막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성령의 중요한 일, 바로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기도 속에서 어떤 단어, 어떤 구절로 나를 터치하고 머물게 하는지에 민감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어느날 차를 몰고 출발하면서 문득, 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지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면 언제든 극동방송이 켜지도록 주파수 106.9에 라디오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손을 대었던지, 아니면 어쩌다 잘못 손이 스쳤던지 극동방송이 아니라 다른 방송이 켜져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주파수가 107.7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주파수는 겨우 0.8이 달라졌지만 극동방송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주파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세상 쪽으로, 조금만 걱정 쪽으로 주파수가 바뀌면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내 삶이 온전히 주님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한번 전해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축사 말씀을 전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어떤 교회에 부목사로 계시던 분이 다른 교회로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고, 같이 섬기던 담임목사님이 축사를 하기로 부탁을 받았습니다. 취임예배 당일 축사를 준비해 왔던 그 담임목사는 자신이 준비해온 내용이 너무 상투적일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축복해주면 그 부목사였던 목사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하고, 순간 생각나는 것을 메모를 해서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해주셨던 말씀 내용입니다. 제목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란?" 이었습니다.
①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아지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②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③ 교인들을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이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④ 돈 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⑤ 예수님의 칭찬을 듣기에 사람들의 칭찬, 자랑, 명예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⑥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⑦ 괴롭히는 사람, 가시같은 사람들도 오직 사랑만 하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⑧ 목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⑨ 은퇴할 때, 아무 미련이 없이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비록 새로 부임하는 목사님을 위해 해주신 말씀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이 해주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이번 한주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한주의 첫 시간을, 하루의 첫시간을 주님께 드리면서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의 첫 음성을 주님께 드리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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