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설교요약
테레사 수녀님이 길거리에서 한 깡마른 소녀가 구걸을 하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씻겨주고, 먹을 것을 주고, 깨끗한 침대에서 잘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소녀는 수녀원을 나가버렸고, 수녀님이 어제 만났던 그 자리로 갔더니 여전히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수녀님이 한 수녀님에게 부탁해서 도대체 그 소녀가 음식을 구걸하여 어디로 가는지를 뒤따라 가보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한 허름한 움막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후 그곳에는 이 소녀가 구걸해 온 것을 끓이는 한 여인이 보였고, 그 아이는 그 곁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왜 깨끗한 수녀원을 버리고 여기로 돌아왔느냐고 물었더니 "여긴 내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고, 어머니의 사랑이 있는 곳이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누추해도 어머니의 품이 가장 포근하고 따뜻한 곳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일까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교회는 좋은 시설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는 교회여야 하지않을까요?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보고자 만들어진 것이 Cell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셀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초대의 어떤 특징을 우리가 사모해야 바람직한 셀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1. 확장된 가족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의 출발은 가정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교회라고 지은 것이 아니고 작은 가정에서 움트고 자랐습니다. 다시 말해 소그룹 공동체로 시작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한 권속이라 했습니다. 이 의미를 심도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인들은 이방인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지옥불의 땔감'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에베소인들을 성도요 권속이라 했습니다. 성도는 '하기온'이라 하는데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일컬을 때만 사용합니다. 그리고 권속은 '식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한 식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에베소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린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초대교회가 가족공동체와 같이 끈끈한 공동체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열린 사고를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에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선지자와 교사들, 다시 말해 리더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게르는 니그로와 어원을 같이 합니다. 흑인 이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인종차별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2,000년 전 그곳에는 이런 인종차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린 공동체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초대교회가 가족공동체와 같이 끈끈한 공동체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도의 간디에게 전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합니다. 그는 성경과 교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교회에 갔을 때, 유식인종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는 좋아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너희 기독교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너희가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기에 그 간디를 품지 못했습니다. 가족공동체 개념을 잃게 되면 하나님의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분당 교회 앞에는 노숙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떼웁니다. 그래서 여성도들이 간혹 밥을 준비해서 그들을 먹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는 주지만, 한 가족이라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들이 냄새나는 옷을 입고 교회를 찾는다면, 과연 쌍수를 들고 Welcome 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도 잘 나가는 사람을 환영하게 되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세상의 어느 모임에서도 합니다. 우리가 달라야 하는 것은 잘 나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사람도 똑같이 환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힘이 드는 것은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관계가 힘들어서 라고 합니다. 가족은 취미가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포용합니다. 그 가족 관계가 교회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가족공동체로부터 확장된 초대교회가 가장 닮아가고 회복해야 하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동탄지구촌교회는 함께 어울리고 섬기는 그런 가족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만인 제사장적 공동체입니다.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 위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 때,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제사장만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제사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에서 일어나 중요한 요소를 신학자 빌백햄은 "첫 종교개혁이 사제의 손에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넘긴 사건이었다면, 제2의 종교개혁 과제는 사제의 손에만 있는 사역을 평신도에게 넘기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평신도의 손으로 넘겨졌다는 것은, 당시 성경이 라틴어로만 씌여 있어서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을 했고, 쿠텐베르그의 인쇄술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로 된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또 영어로 쓰인 성경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누구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사역도 사역자들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목회자를 중심으로한 20% 정도만이 사역을 감당하고 80%는 실천에서는 구경꾼들에 불과 했던 것이, 꺼꾸로 80대 20으로 바뀌었습니다. 구경꾼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사장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만인이 제사장이 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출석개념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는 제사장적 공동체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한 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도 없는 그런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나도 제사장이고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따뜻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골로새서 4장 7절과 10, 11절일 보겠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7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10,11절) 항상 따라 붙는 단어가 '함께' 입니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함께 함이 우리에게 든든함을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 교회를 두 종류로 구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와 '전투함 같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먄 결국 진정한 따뜻함과 든든함을 주는 교회가 될까요?
3. 코아노니아 공동체입니다.
지난주에도 이 코이노니아를 언급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교회가 되려면 교제가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잘 지어져 가려면 서로가 연결되고 또 좋은 촉매제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주 만나고 얘기하고 나누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교회였습니다. 교제를 통하여 교회 내에 낮선 사람이 없어지고, 노년과 청년들 사이도 연결되어질 수 있게 됩니다.
조지 바나의 얘기입니다. "미국은 가장 개인주의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미국은 가장 외로운 나라이다" 가장 잘 살고 있는 나라라는 그 미국이 세계적으로 우울증 약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웃간에 담벼락이 필요 없었던 우리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의 바로 옆집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Communication 미숙아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예배에는 참여하지만 곁에 앉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청소년 수련회에서 단 하루 밤을 같이 보낸 청소년들이 옴 몸으로 통하고 밤을 새워 얘기하는 관계로 변함을 보았습니다.
많은 한국 교회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성도들 하나 하나를 깊이 들여다 보면 힘들고 외로운 싸움 속에 있기도 합니다. 밖으로는 부흥하고 있으나 안으로는 곪아가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셀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겠지만, 만나서 삶을 얘기하고 기도를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셀공동체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입니다. 다 같이 동참하여 제 자리를 잡아가도록 합시다.
4. 전도지향적 공동체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무수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했던 부분은 전반부 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 이유입니다. 왜 택하셨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는가 입니다. 그것은 후반부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심이라'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은 복음을 얘기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역의 명분을 분명히 할 때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셀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만나서 매번 똑 같은 애기를 나누고 똑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내 지치고 식상해지게 됩니다. 근본적인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 사명입니다.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있는데 사도들이 굳이 나아가 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할 부분은 이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권세는 예수님께 있지만 순종은 우리의 몫입니다. 순종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셀공동체에서 이 사역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무리입니다. 마무리는 김승섭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하고자 합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어느 시골에 로제토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1880년대에 이탈리아 로제토라는 지방에서 광부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로제토 사람들이 계속 이주를 하여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생기고, 빵집, 이발소, 식당, 술집 등 생활환경이 조성되었고, 미국에서는 그 마을을 로제토 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1958년, 오클라오마 의과대학 교수인 스튱트 울프가 로제토 마을 인근에서 강연을 하다가, 그지역 의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로제토마을 주민들 가운데 65세 이하의 사람들 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이 17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현존하는 주민들도 심장질환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의 심장마비 사망률에 비해 현저히 낮은 통계가 나온 것입니다. 울프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로제토 마을 주민들을 일일이 인터뷰 하였습니다. 주민들에게는 마약이나 알콜 중동자도 없고, 자살자도 없고, 심지어 어떠한 종류의 궤양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식습관이나 자연환경, 생활습관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아니면 유전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예상은 다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로제토 주민들은 여느 미국인들처럼 기름진 음식도 멋고, 단 음식을 즐겼으며, 특별한 운동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연환경도 다른 지역과 비슷했습니다.
조사를 마무리할 쯤에 울프는 마을을 거닐면서 로제토 주민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하였고, 그는 거기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지나다가 아무라도 만나면 정답게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서로 이웃을 방문하고 다정하게 음식을 나눠먹었으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정담을 이어갔습니다. 생각해보니 조사가 진행되는 긴 기간 동안 가족이나 이웃끼리 다투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한가지 뚜렷한 특징은 젊은이들이 연로한 이웃 어른을 가족처럼 존경했고, 어른들은 다정하게 이웃 젊은이들을 훈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3대, 4대가 한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고, 식구가 많을수록 화목하고 행복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2천명 남짓한 로제토에 봉사단체가 22개나 되어 여러 형태로 이웃을 돕고 있었습니다. 로제토 주민들은 이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로제토 마을이 장수마을이 되었던 이유는 식습관도 아니고, 유전이나 자연환경도 아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모두가 가족같은 분위기 속에서 작은 천국을 이뤘던 그들의 생활방식이 유일한 비결이었습니다. 로제토주민들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명 베풂의 싸이클 속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이 갑자기 죽게 되더라도 이웃이 자기 자녀를 잘 돌봐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변이 언제나 함께 해줄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공동체, 이보다 더 좋은 공동체가 있겠습니까? 로제토 마을은 예수믿는 사람들로 모인 동네가 아닙니다. 그런 로제토도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예수믿는 우리가 도전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새로 개편하는 목장교회를 통해 이 아름다운 셀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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