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20612_설교정리_내가 만든 신(1) 돈 (눅19:1~4)

서정원 (JELOME) 2022. 6. 13. 08:30

○ 말씀전문

[누가복음 19장 1절~4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설교요약

요하힘 바흐는 신앙체험의 4가지 본질로 첫째, 하나님의 터치가 있을 때 참 신앙이 시작된다는 궁극성. 둘째,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삶 전체가 바뀐다는 전체성. 셋째,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에 대한 확신이 명확해진다는 강렬함, 넷째,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뀔 수 밖에 없게 된다는 행함을 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한 삭개오에 대한 성령의 기록입니다. 세리장으로서 부자였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하게 됨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내가 좀 더 변화되어 새로워졌으면 좋겠다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으면서도 내겐 변화가 없을까 싶은 사람은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1. 채워지지 않은 문제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당시 여리고로 들어가면 가장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그곳의 세리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삭개오란 이름은 '순결하다', '거룩하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좋은 것은 다 로마로 보내고, 백성들은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엔 단지 두 부류의 부자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인들이고 하나는 세리들이었습니다. 세리를 쉽게 이해하려면 일제강점기의 일본 앞잡이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삭개오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로마의 앞잡이 두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말못하는 답답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고 자기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다들 자기 앞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를 이용해 먹으려는 아첨꾼들만 다가오고 대부분 돌아서서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던 그에게 어느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돈 한푼 없이도, 권세자 앞에 굽히지도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예수님이 늘 궁금했고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을 보려고 모여있었고, 키가 작은 삭개오는 발 뒷꿈치를 들어보았지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처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돌무화과 나무는 천민들이 열매를 따려고 올라가던 곳이었습니다. 세리장 같은 부자들은 오르기엔 체면이 서지않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를 삭개오는 타고 올랐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목마름이 염치와 체면도 버리게 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마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돈도 벌고 직위도 올라갔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가도 가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의 마음에는 텅빈 공간이 있다. 그 방은 하나님 만이 채울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비단 나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그 목마름을 목마른채 살아가는 우를 범하기 보다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 해결하는 자가 현명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빈 공간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5장 1절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삭개오가 가진 핸디캡은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데, 군중 속에 서면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키를 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가면 사람들은 존경은 커녕 멸시하는 눈빛과 조롱하는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그런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자, 예수님이 쳐다보시고는 5절부터 7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는 뭇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멸시와 조롱의 눈빛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심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눈빛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삭개오야 내려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엔 두 가지 핵심적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름입니다. "삭개오야" 라고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조롱하는 소리로 세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온 그에게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하는 뜻으로 이름을 불러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 부름으로 모든 위로를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단어는 "내려오라" 입니다.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떨어지면 다칠 수도 있는 연약한 나무에서 내려오라 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걱정해 주시는 예수님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부여잡고 있던 아픔, 즉, 돈과 출세와 같이 허울 좋게 부여잡고 있던 그 아집에서 내려오라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오롯이 알아주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심지어 배우자도 내 열심을 알아주기 이전에 내게 가진 서운함 만을 토로합니다. 온갖 정성을 다했던 자식조차도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내기는 커녕, 남의 부모와 비교하면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실 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채워지지 않았던 것들을 내어놓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의지하고 안주하던 돈, 노후준비, 자식걱정.... 그곳에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비행기 안에서 삭개오를 묵상하다가 떠오르는 시상으로 단숨에 작곡하셨다는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주님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고단한 인생과 허무한 성공에

속아버린 내 이름을요

모두들 떠났고 모두를 속였고

모두를 원망했지만

오늘을 기다렸어요

주님을 만날 그날을

앞으로 갈게요 나무라도 오를게요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오늘만 기다렸어요

주님만 따를 그날을

 

3. 인생의 근원적인 우상이 바뀌었습니다

삭개오를 통해 주시는 말씀의 백미는 8절과 9절에 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가진 것의 20%만 내어놓아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았던 사람도 그것의 5분의 1을 더해서 보상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갑절보다도 많이 내어놓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 변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돈을 손에서 놓는 이 모습은 그의 내면까지도 바뀌어지는, 일생일대의 우상을 내려놓는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우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표면적 우상입니다. 돈이나 자녀, 성공, 권세와 같은 보이는 우상입니다. 또 하나는 근원적 우상으로 안정, 통제, 조정, 인정과 같은 무형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돈을 우상으로 삼게 되는 근원적인 배경에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안정, 권력을 손에 쥐어 다른 사람들을 내 통제 아래 두겠다는 생각, 모든 권한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조정하겠다는 욕심, 멸시 당하지 않고 존중받으며 살겠다는 인정과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을 정말로 내려놓으려면 그 배경이 되는 근원적 우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돈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았던 것에는 이 근원적 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을 모으고도 그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지 않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상은 우리의 갈증을 결코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가 이 근원적 우상을 포기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대체 될 수는 있지만 절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상이 자리하고 있던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로 채울 때, 비로소 인간은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구원이 임했다는 것은 그 마음에 우상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깨어진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와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는 때는, 내 마음의 근원적 우상이 깨어지고 예수님이 내 주심에 오실 때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오고, 원하던 것들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찜찜함을 느낍니다. 오랫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 우상을 깨뜨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주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히 변화한 삭개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진정한 안식, 진정한 안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중심에 있는 삶에 있습니다. 그 분을 내 중심에 자리 하시게 해서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