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말씀전문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ㅁ 말씀요약
로마의 한 수도원 원장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BC와 A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BC는 Before Christ로 기원전이라는 뜻이며, AD는 Anno Domini로 기원후 라는 뜻입니다. Before Christ는 글자 그대로 예수님이 계시기 전이란 의미이고, AD의 Anno는 '해', Domini는 '주님의'라는 합성어로 '주님의 해'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원전과 기원후는 모두 예수님이 계시기 전과 예수님이 계신 후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두 단어가 모두 너무 종교적이라 하여 BC를 BCE (Before Common Era)라고 사용 하기도 했지만 이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계시기 전과 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역사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1950년대까지 단기를 사용하다가 1962년부터 이 서기를 사용하고 있고, 지금은 모두가 이 서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시대적으로는 예수님이 계신 이후에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수님 이전의 삶과 별반 다름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만이라도 예수님이 있는 삶, 예수님 이후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깨닫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왜 예수님 이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지를 베데스다 연못 곁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베데스다는 예수님이 존재하는 삶이고, 예수님이 없는 베데스다는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던 삶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는,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자화상이요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찾아가시기 전의 베데스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 지나친 경쟁의식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가 있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그 신화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첫째,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입니다. 육상선수가 스타트 선에서 총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듯, 모두가 물이 움직이면 제일 먼저 출발하려고 귀를 쫑곳하고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이 없는 베데스다에는 치열한 경쟁만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닌,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도 치열한 경쟁의식이 난무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도 영적 베데스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승진하려는 경쟁의식, 남보다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경쟁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삶의 비극입니다. 데일 워커는 현대인의 삶을 3B라고 했습니다. Busy, Buried, Behind. 늘 바쁘고, 자신을 죽이는 삶, 그리고 늘 남보다 뒤처져 있다는 조급함으로 얼룩져 있다고 했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보면 이른 시간부터 버스 정류장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세상은 더 열심히 뛰어야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쏙삭이는 사단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경쟁을 부추키는 것은 사단의 일함입니다.
이 3B를 해소할 처방전으로 3V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Voice (하나님의 말씀), Value (삶의 가치), Vision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세상의 소리,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와 가치를 듣고 달려갈 때 지나친 경쟁에서 자유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자비의 집에 자비함이 없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앞서 본 3,4절 문맥에서 핵심적 단어는 '먼저'입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정상적이 아닌 병자들입니다. 서로가 도와주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엔 도와주는 자비로움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만 생각했습니다.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도와주는 사람은 커녕, 다른 사람이 더 어려워서 못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서로 먼저 가려고 싸웠습니다. 38년 간이나 이런 환경 속에 내팽개쳐진 그 병자는 어쩌면 육신의 아픔 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더 컸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영적 베데스다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07년 이곳 동탄에서 개척을 하면서 가장 눈에 뜨였던 캐치 플레이저가 생각납니다. "동탄, 도시에 감동하고 생활에 감탄하다" 라는 문구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모양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 내재된 이글거리는 이기적인 경쟁심이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새로이 분양하는 아파트에 청약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안식과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이곳에 왔을 텐데, 그 안식과 평화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기 욕심만 가득한 도시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긍휼함을 잃어버리고, 넉넉함과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극구 막습니다. 이웃을 위한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데도 내 동네에는 안 된다는 무 자비함이 판을 칩니다. 아파트에서 주차 문제로 사생결단을 할 것처럼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베데스다의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치유하는 일 보다 안식일을 지키는가를 잣대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노동이라고 걸고 넘어집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비가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주에 온세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중에 아이들의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 찬송을 보고 지도하셨던 한 집사님이 너무가 감동스러웠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움이 많고 소심했던 한 아이가 연습할 때는 그렇게 따라 하지 못하더니 무대 위에서는 옆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까지 열심히 따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이 나더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해 주는 이 집사님의 마음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늘 함께 웃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년들이 다음 세대를 늘 너그럽게 봐주고, 다른 성도들도 너그럽게 봐 주는, 배려와 섬김의 은혜가 가득한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함께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3. 삶의 의욕이 꺾여져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 상태를 보여주는 정황이 3절에 보입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누워'와 '기다리더니' 라는 단어인데 둘 다 수동적인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어떤 소망도 기도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6절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히 낫고 싶을 텐데도 굳이 이렇게 물은 것은, 오랜 된 줄 아시고, 또 삶의 의욕이 꺾여 있는 모습이었기에 물으신 것입니다. 의욕이 꺾여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도 '안 된다'는 것도 학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학습된 무기력을 치유해야 합니다. 가족이나 주변의 지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병자에게 처럼 말입니다. 38년 된 이 병자가 치유된 비결은 첫째,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베데스다에서 주님이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어나 네 자리를 갖고 걸어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기력해 있는 우리에게도 이 처방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라는 선포, 걸어가라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회복, 새로운 인생은 주께서 찾아오시고 선포하실 때 시작됩니다. 그 선포와 축복이 있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 한 선배 목사님을 만나 식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지독한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너무 쪼달리는 형편 때문에 딸들은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 자랐고, 아들 중 하나는 조폭이 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행이 이 목사님은 예수님을 만나고 신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다가 덜컥 개척을 했다가 큰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도망치듯 빈민사역에 뛰어들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들 이름이 지호인데, 벼랑 끝에 서있다고 자책하던 그때 지호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답니다. 아들이 글을 잘 쓴다며, 이번에 경기도 대표로 글짖기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며 가볍게 넘겼습니다. 그 소식에서 기쁨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대상을 탔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글 내용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지더라고 했습니다. 제목이 '홍수와 요강' 이었는데, "지하로 17개단을 걸어 내려가야 했던 지하실, 비가 약간이라도 오면 빗물이 들어와 퍼내야 했고 화장실을 갈 수 없어 네 식구가 요강에 오줌을 싸야했던 이야기"였습니다. 초등학생이 썼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아픈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본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무너져 엎드렸습니다. "제 능력은 딱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이 모습과 함께 나의 슬픔, 나의 한숨을 능하신 주님의 손 안에 요강같이 올려드립니다. 역사는 하나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길을 끝까지 부여 안고 가겠습니다" 아들이 쓴 이 '홍수와 요강'이 포기 해야겠다는 목사님을 다시 일어서게 했고, 끝까지 가겠다는 결단의 힘을 갖게 했습니다. 이 결단이 있은 후 지금까지 7년간 목사님의 교회에는 매주 새 교우가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베데스다 같은 무기력하고 의욕이 꺾여진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있는 인생에는 의욕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활기찬 결단이 날마다 솟아나는 삶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계시지 않던 BC의 삶에서 머무르지 말고, 예수님이 계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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