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전문
[사도행전 6장 16절]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설교요약
옛날 로마시대 동전 중에 쟁기를 맨 큰 황소가 제단을 바라보고 있고, 그 둘레에 '두 가지를 모두 갖춰라' 라고 각인된 동전이 있었습니다. 쟁기를 맨 큰 황소는 '충성됨'을 나타내고, 제단을 바라보는 것은 '헌신하는 삶'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갖추라는 뜻의 동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충성되고, 희생과 헌신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3절과 25절에서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본문은 이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기 위해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온통 코로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찬 우리 마음에서 코로나를 몰아내고 진짜 온 마음으로 사모해야 할 영적 충만함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초대교회의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전통파로서 나면서부터 유대인인 히브리파이고, 다른 하나는 1.5세대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헬라파입니다. 이 헬라파가 자꾸 구제에서 빠지므로, 초대교회에서는 일곱 집사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고 사도들은 기도와 예배에 집중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언듯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성령 충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그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7장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리고 59절과 60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이성이 어느 때보다도 뚜렷해지고,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뚜렷하게 보여,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 속에 오직 코로나로 인한 걱정으로 가득찬 이 시기에 우리가 마음 속에 가득찬 그 걱정을 걷어내고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내게, 내 가정에, 우리 교회에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됩니다.
2. 지혜의 충만함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다들 남보다 잘 살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고 합니다. 학벌을 중시하고 자격증을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식보다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지혜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과 더불어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지혜는 따로 뗄 수 없는,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칫 외골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여겨서 지혜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성령이 바로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면 지혜는 저절로 따라 온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4장9절에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즉 영입니다. 성령의 별명이 지혜의 영인 것입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가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여호와께서 무엇을 원하는가 라고 묻자 '선악을 분별케 하는 능력과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을 "쇼메"라고 하는데 지혜로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한국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에서 한 아이가 쓴 말이 우리를 염려케 합니다. '교회는 이기적인 종교집단이고 교회는 다 똑 같다'는 그 말을 보고 한국 교회의 앞날이 암담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이 나라의 주역들이 될 텐데, 우리의 신앙을 그들에게 영적 유산이라며 물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우리가 정작 생각하고 내밷어야 하는 말은 감정에 좌우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하는 영적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혜를 보였으면 합니다. ① 분별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 내 가정,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는가를 분별했으면 합니다. ② 겸손의 지혜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오더라도,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③ 성령의 지혜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여호와의 이름만이 할 수 있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의 충만함을 구해야만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당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믿음의 충만함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는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합니다. 은혜와 축복이 가득할 때는 우리는 믿음의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의 코로나와 같은 사태 앞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라고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정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승리케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테스트를 받고 있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본문 5절과 6절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분명 3절에서는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를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은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성령과 지혜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에는 성령충만함과 지혜의 충만함이 같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돈독한 믿음이 생기게 될까요? 첫째,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할 때 믿음이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아침 묵상, 지속적인 영성 일기가 우리를 예수님에게 주목하게 합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여기서부터도 다시 인도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여기서부터도 다시 인도하신다' 라는 것을 믿고, 믿음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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