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QT_B/신앙_QT_출애굽기

200715_QT_출애굽기11장_최후통첩

서정원 (JELOME) 2020. 7. 15. 08:28

○ 말씀전문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바로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4 모세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 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 모세아론이 이 모든 기적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 내용관찰

바로와 모세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뜻을 바로에게 계속 전하였고 그 말씀에 따르지 않는 바로와 이집트에 재앙을 내려왔습니다. 거기에 대해 바로의 완강한 저항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가만히 보면 모세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로운 예배를 회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로의 저항은 갈팡질팡 합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끝장을 봐야 할 시점까지 왔습니다. 이제 최종적인 재앙으로 여호와는 애굽의 사람과 가축의 첫 태생을 모두 죽이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 연구와 묵상

인생 말년에서 바라보면 사람마다 두 가지 개성으로 나뉘어져 고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소위 경영을 해 온 사람과 기술을 담당해 온 사람들은 확연히 다릅니다. 인생관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대인관계도 다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술자로 살아온 사람들은 '엔지니어의 고집' 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자기 주장이 아주 강합니다. 반면에 관리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타협에 익숙합니다. 세상에 잘 적응합니다.

나는 평생 엔지니어로 살아왔다가 오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임원이 되었고 그때부터 소위 경영을 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내 뼈속 깊이 박혀있는 '엔지니어 기질'를 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심심찮게 느낍니다. 매일 같이 기도 제목이 '섬기며 살게 해 달라' '구성원들의 말에 경청하게 해 달라' 하지만 그것이 오래 유지되지 못함을 깨닫고는 통애하게 됩니다. 집안의 작은 문제에 대해서도 아내나 딸들에게 내 주장을 억지로 강요하다가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것이 아직도 간혹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어느날 이동원 목사님께 목사님은 어떻게 늘 편안한 얼굴을 할 수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럴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늘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는 싶은데 참 잘 되지를 않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소망하는 것이 타협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사에서는 고집보다는 타협이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타협이 능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로가 계속되는 재앙을 견디다 못해 처음으로 제시한 타협안은 '그래 제사를 드려라. 그러나 살고 있는 애굽땅 이곳에서 드려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언듯 보면 괜찮은 타협안인 듯 싶지만, 그것은 한두번으로 끝날 수도 있는 예배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자유를 가지고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두번째 타협안은 '그래 알았다. 광야로 가서 드려라. 그러나 직접 제사를 드리는 장정들만 가서 드려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제사를 마치고 나면 가족들 때문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과, 예배를 유산으로 가르치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모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로는 '그래 알았다. 아이들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양과 소는 두고 가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물없는 예배, 헌신없는 겁데기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라서 모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타협해야 할 것과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들로 갈등을 이르키는 고집은 버리고 수용하고 타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타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갈등 투성이입니다. 검찰과 조국장관을 놓고 극한 분열을 일으키더니, 며칠 전부터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두고도 SNS에 분열이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내 주장은 갈등만 초래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코로나가 예배를 느슨하게 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자녀들이 학교 생활로도 피곤하니 다음에 대학가면 그때가서 교회에 나가게 하겠다며 미루는 타협은 안됩니다. 타협과 고수가 제대로 구분되어 승리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결단과 적용

 

○ 기도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