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191020_설교정리_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서정원 (JELOME) 2019. 10. 20. 15:23

○ 말씀전문

[빌립보서 1장 3절~11절]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 설교요약

독일의 마이케 반 뎀 붐이라는 작가가 쓴 [행복한 나라의 조건]은 부유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자국민들에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나라, 즉 OECD가 선정한 "가장 행복한 13개국"에 대해 그 행복의 비결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세금이 50%인 덴마크 사람들은 왜 빼앗긴다고 생각하지 않읅까?  노동시간 1위인 멕시코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축제를 즐길까?  학업 성취도 1위인 필란드 사람들은 왜 사교육비를 거의 쓰지 않을까? 세계 20대 유전 보유국 노르웨이는 왜 돈자랑을 금기시할까? 등를 통해 행복이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 조건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4대 서신서를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빌립보서는 주로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오랜 감옥 생활에서 기쁨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을까를 알게 되면 그의 행복의 비결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 마다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1. 함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3절~5절)

 빌립보는 당시 로마 식민지였습니다. 어느 나라든 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는 것, 그것이 바울에게는 큰 감사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2007년 제가 몽골로 선교를 떠날 때, 갓 입대해서 구릿빛 얼굴 사이로 유난히 잇빨이 희게 보이는 한 이등병 청년이, 군에서 받은 첫 봉급 10만 8천원을 들고 찾아와서, 군 생활 때문에 직접 선교활동에 참여는 하지 못하지만, 헌금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느꼈던 그 감동과 같았을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은 그 기쁨의 이유로 그들이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기 보다는 고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은혜라고 표현 한 것은 고난과 수고마져도 하나님의 은혜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 때문입니다. 이 시선이 고난을 기쁨과 감사, 나아가 행복으로 끌어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수고와 고생이라고 쓰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읽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늘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었던 원천이 빌립보 교인들이 식민지라는 고난 속에서도 자신과 복음을 같이 해 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힘든 상황 하에서도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동역자가 있을 때 언제든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6절)

결혼 전에 오랜만에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갔을 때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늬 때보다 반기셨습니다. 고향에 있는 어느 자매님이 그 전에 몇번이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고향에 오면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소 목회한다고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니는 그 자매가 내게 관심이 있어서 연락해 달라고 한 것으로 생각하시고는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연결로 그 자매님을 만나서 얘기를 해 보니, 그 자매님이 중학교1학년일 때 수련회에서 내가 인도하는 조에 편성되었었으며, 그 때 큰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의 변화를 영성일지로 작성해 왔다면서 두툼한 바인더 4개를 가지고 나왔었습니다. 나는 그 자매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주님께서 그 자매님에게 여전히 일하고 계셨음을 깊이 느끼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재림의 날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고 이루어 가십니다. 자기의 기쁨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계십니다. 처형의 시아버지께서 아산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친지들이 함께 병문안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난 막내 사위라서 그냥 그 무리 속에서 조용히 있다가 오면 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내 마음에 "지금이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국 함께 간 사람들에게 20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순종으로 그 분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부모님, 형제 자매에게, 지금도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하던 기쁨의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기도 가운데 또 하나의 열매를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11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음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더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복음은 곧바로 하나님이 주시기 보다는 전하고 전해서 퍼져나갑니다. 베드로도 동생 안드레를 통해서 전도되었으며, 나다니엘도 한동네 사람인 빌립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전도가 가능했던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① 찾아간다 입니다. 전하고 싶은 대상을 직접 찾아가야만 전할 수 있습니다. ② 데리고 온다 입니다. 그들이 부담스러워 하고 주저할 때 직접 손을 잡고 동행함이 큰 힘이 됩니다. ③ 먼저 입니다. 먼저라는 것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우선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대상으로 생각하는 그가 가장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자,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대상자로 선정합니다. 다음은 '시간적인 순서에서의 우선성"입니다. 이 때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바로 그 때입니다. 지지난 주에 전도폭발팀에서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힘들어 했던 분을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난 목요일에 평안히 소천을 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한 때가 우리 전도폭발팀이 전도한 그 때가 아니었으면 그 분은 구원을 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 열매를 바라보게 되면 전도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전도의 열매가 곧바로 열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도의 권세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나의 입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그 마음, 그 심정으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회복할 때, 내 마음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말씀을 들어면서 나의 지나간 일이 되살아났습니다. 아버님은 뇌출혈 후유증으로 3년 정도를 거의 누워서 지내셨습니다. 2006년 추석 날입니다. 성묘를 다녀온 친지들이 대청 마루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장로였던 막내 숙부님이 아버지 방에서 한담을 나누는 것을 제가 무심코 캠코더로 촬영을 했었었습니다. 20분 정도의 분량이니다. 그 전에도 숙부님의 전도에 꺼떡도 않으시던 아버님이 그날 숙부님의 간절한 전도에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저도 그 당시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때였고, 그것이 결국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 일입니다. 우리는 추석을 보내고 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추석 후 딱 3일째 되던 날입니다. 연휴를 보내고 첫 출근을 하던 시간에 저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으로 형님에게 복음을 전하신 우리 숙부님, 그리고 그 때가 아니었으면 영영 아버님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겠구나 생각하니, 그 때가 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 덕분에 아버님 기일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마음 편히 추도예배를 지냅니다. 이 얼마나 내게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