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_설교정리

220710_설교정리_내가 만든 신 (5) 힘 (Power) (고후 12:8~10)

서정원 (JELOME) 2022. 7. 11. 20:14

○ 말씀전문

[고린도후서 12장 8절~10절]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설교요약

지난주에 우리는 구약에서의 사울이 인정(Approve)이라는 우상에 빠졌음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신약에 나오는 사울도 우상이 있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의 사울은 힘(Power)의 우상에 빠져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Power도 우리 인간이 우상처럼 여길 대상이 됩니다. 

힘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나름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내게 능력과 영향력이 있어야 인생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향력과 능력을 얻지 못하면 심한 수치심과 굴욕을 느낍니다. 그 능력을 얻으려고 경쟁심을 드러내며, 주변 사람들을 이 힘을 얻는 수단과 도구 쯤으로 여깁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조종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힘과 영향력을 얻게 될지라도 허세를 부리고 그 허세로 인해 관계가 파괴됩니다. 그 우쭐댐은 그를 교만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로 서게 됩니다.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 사이에는 이런 우상에 대한 닮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바울이 구약의 사울과 다른 것은 신약의 사울은 이 점을 깨닫고, 바울로 새롭게 태어난 점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1. 세상적인 자랑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기 전에는 그는 자신의 능력과 힘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부터 6절까지가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온통 자기 육신에 대한 자랑투성이였습니다. 학문에 대한 자랑도 대단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2대 산맥이 있었습니다. 삼마이파와 힐렐학파입니다. 샴마이파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믿는 파였습니다. 샴마이의 제자가 가말리엘이었고, 그가말리엘의 수제자가 사울이었습니다. 출신 성분도 대단한 자랑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말 그대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힘과 영향력을 우상처럼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래전에 동남아 선교를 위해 하노이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도회지도 구경하고 쇼핑도 할 겸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상점 앞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가죽과 모피를 파는 매장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노이는 덥고 습한 곳입니다. 상식적인 면에서 보면 가죽옷과 모피옷이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피옷을 사려고 줄을 섰다는 것은, '나는 모피옷을 입고 지낼 정도로 우리 집 에어컨이 빵빵하고 부자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나도 갖고 싶고 입고 싶다는 눈초리를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비단 하노이 시민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전히, 명예와 힘을 가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쫓으면 우리 역시 힘과 영향력의 우상 아래 놓이게 됩니다.

조지 바브쉐어 목사는 원래 세일즈맨이었습니다. 노래를 아주 잘 해서 오디션에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수로 출세를 할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그의 어머니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그의 책상에 엎드려, 아들이 연예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들어오는 기척이 들리자,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시를 적어놓고는 조용히 나왔습니다. 아들이 자기 방에 들어와 어머니의 메모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어머니의 메모를 붙잡고 깊이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중에 나타난 악상 영감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입니다. 그는 결국 목회의 길로 갔고, 빌그레함 목사님 예배 때 특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예배 도중에 이 찬송가를 같이 불러보자고 했답니다. 진심으로 불러보자며, 진정으로 이 가사가 고백되어지는 사람만 부르자고 했답니다. 반주가 끝나고 찬송을 부를 때가 되었는데 아무도 부르지 않아 침묵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 둘 흐느낌이 터져나오고 많은 성도들이 감동으로 불렀답니다. 찬송이 끝나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 복음을 교리로 이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십자가의 복음을 믿었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

우리 중에도 입술로는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삶에서는 세상적인 자랑을 취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되는 이 한주를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라고 고백하고 결단하여, 그 어떤 우상에도 빠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진 사람입니다.

사울이 바울 된 분수령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과 18절에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의 비늘이 뜻하는 것은 과거에 자랑으로 여겼던, 출신성분, 학벌, 시민권, 고집과 신념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의 약점을 건드립니다. 사울이 눈을 뜨고 살아 왔지만 그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던 사울의 눈을 터치하셨던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비전의 사람]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치셨던 것은 사울로 하여금 겪게 하심이 목적이 아니라, 그를 바로 세우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 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비늘을 쓰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허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지만, 그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편견과 신념이 빚어낸 하나님의 허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섬김과 봉사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됩니다."

우리의 변화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벚겨질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목회를 하던 나가노 마키 목사는 개척을 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성도가 한 명도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목회를 접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목사님은 그와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막 식사를 하려는데 그가 식탁 위에 피를 한 바가지 쏱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아무렇치도 않은 듯 행주를 가져와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식탁까지 깨끗이 닦은 후에, 다시 식사를 차려와서 같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은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이며, 아버지와 주변으로부터 심한 냉대를 받아, 꼭 성공하여 부와 명예를 얻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 공부를 하던 중에 폐병이 걸려서, 신학교에서도 추방을 당하고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조차 내쳐졌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암담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 인생을 예수님께 바치겠다'라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다 찾다 온 곳이 나가노 목사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가나와 목사인데, 나중에 일본이 패하고 중국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무사히 일본으로 데려오게 한 분입니다. 식당 위에 쏱은 핏덩어리를 아무렇치도 않게 받아준 나가노 목사,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 이렇게 행동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속적인 가치관이 이 비늘 같이 벗겨지기를 소망합니다.

 

3.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28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기에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부끄럽게 한다' 입니다.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카타이스퀘네' 인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카타이스퀘네는 지혜로운 자들이나 강한 자들이 스스로 자각하여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서는 당신을 무시하는, 그들의 세상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신원해 주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여건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못난 사람을 써 주심으로 잘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의 여성 총리로 골다 메이어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형병이라는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쓰임을 받은 것에 대해, 그녀는 1967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제 얼굴이 못생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봤을 때, 너무 못났기 때문에 더 열심히 기도했고, 정말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나의 이런 연약함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도 무한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약점과 실망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 엎드림이 은혜가 되어 되돌아와 부르심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 오늘 말씀의 본문입니다.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심한 간질과 안질, 그것이 바울의 연약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약함 덕분에 신앙 성숙을 이루고 강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성숙은 약함으로 인해 얻어집니다.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한없이 약해져 있을 때 성장합니다.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주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먹먹해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Key입니다. 능력과 힘을 구한다고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상일 뿐입니다. 능력과 힘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처럼 섬길 때, 그 하나님의 힘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힘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그 능력 없음이 연약함이라 는 것을 깨닫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