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18_설교정리_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요한복음 (11장 17~44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
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
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
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
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
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중략)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
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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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는 것
자체가 두려울 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도 힘들
고 두려운 일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뿐만 아니라 예수님 조차도 나사
로의 죽음과 그것을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냥 슬퍼만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를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큰 소
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1. 죽음 저편에 존재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이요 천국입니다.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그가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믿는 자의 죽음은 잠자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죽음
을 무력화 시키신 것입니다. 죽음은 마귀가 준 것이지만 예수님은 생명
을 주셨습니다. 육체적 죽음 뒤에 준비된 영생의 생명을 생각하며 우린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생명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은 나사로를 사용하셨고, 직접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귀의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예수님을 붙
잡고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의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소망을 갖지
못하면 지금처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계속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 죽음 이편에 존재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 저편의 소망으로 되살아난 나사로와 달리, 죽음 이편에서, 영적 죽
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마르다의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고백하지만, 정작
마지막 날이 되어야만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지
금 나사로에게 생명이 다시 주어질 것임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님은 먼 훗날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소망을 가져야만 죽음 이편에서의 평강과 치유의 은혜도 경험할 수 있
습니다. 삶이 어려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지금 현재도 주께서 부활이요 생명으로 나와 하심을 믿고 담대
하게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