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2_설교정리_이 시대 바알 앞에 무릎꿇지 않는 자가 되라 (롬11:2~4)
○ 말씀 전문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 받은 말씀
LA산불 진화 작업에 나섰던 소방관들은 산불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진화 작업만으로는 역부족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방관들은 목숨을 건 사투로 진화 작업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사투를 건 진화 작업이 그들의 최후의 소임이 아니었습니다. 역부족임을 느끼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그들의 마지막 소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임은 어떤가요? 내 삶에, 내 가정에, 내 일터에, 그리고 내 신앙에 대한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요? 내가 감당해야 할 소임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고 있는가요? 그 소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내 힘이 역부족임을 느끼고도 마지막까지 해야 할 소임까지 다 하고 있는가요?
내게 주어진 이 삶, 내게 주어진 이 자리,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에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소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소임이 무엇이고, 그 소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를 배우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소임은 ...
1. 이 시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3절과 4절입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하나님이 주신 좌표는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다' 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열왕기상 19장 8절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 시대의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할 때의 가나안 지방의 우상신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인지 막막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두려움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의 우상신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신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의 신앙의 주류는 대부분 바알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아합왕이 엘리야와 대결시키려고 부르자 순식간에 850명이나 몰려올 정도였습니다. 이 시대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바알을 숭배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엘리야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바알, 우상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우상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의 시대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엘이 우상이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우상은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자녀의 형상으로, 돈이라는 모습으로, 건강이라는 미명으로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바알과 모습은 달라도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팀켈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행복할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내 앞에 무엇이 우상으로 버티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 앞에 무릎꿇지 않는 자가 되어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소임을 다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2. 이 시대 앞에 깨어있는 영성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졌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로마서 11장 7절과 8절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무너진 핵심적인 원인은 ①혼미한 심령, ②보지 못할 눈, ③듣지 못할 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를 9절과 10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우리들의 밥상이 우리의 올무와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밥상이란 바로 먹고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잊어버리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착하면 우리의 영성이 죽게 됩니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문제입니다. 돈이 사람보다 앞서서도 돈이 주님보다 앞서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돈에 집착하여 사람의 목숨까지도 가볍게 여기는 이 세태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도 돈에 집착하는 것이 일만 악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①깨닫는 마음, ②보는 눈, ③듣는 귀입니다. 신명기 29장 4절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우상에 빠져서 이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영성이 회복되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소임을 다하는 자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후회하심이 없는 그 분의 부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상앞에 무릎꿇지 않고, 날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이 찾아오고 신앙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는 내가 기대했던 일이 생각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목회자들도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고 사역을 감당했는데도 주시는 사역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이 28절과 29절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가 이 부르심에 대해 흔들리고, 오해하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공시키기 위해 부르셨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성공하라고가 아니라 승리하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얼마전에 미국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시다가 사임하고 새로 선교사로 떠나시는 후배 목사님 부부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죽을 힘을 다해 목회를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못하자 사임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는데 결과가 없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실패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분에게 해줄 말씀은 '여전히 주님을 붙들고 있는 한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 승리하고 계시다'라고 위로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바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여전히 승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끝까지 주님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설사 기대했던 결과가 없고, 원치않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되더라도 끝까지 감사함으로 주님을 붙들고 살면 그것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소망과 소임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소임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복된 승리의 인생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