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7_설교정리_복음의 곡조를 배우라 (롬6:10~11)
○ 말씀 전문
[로마서 6장 10절~11절]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받은 말씀
오늘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언젠가 들었던 강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강의 제목은 '한국 교회의 핵심 문제' 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성도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교회 건물만 번지르하게 짓는 것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는, '복음의 가사는 알지만 부를 수 있는 곡조가 없다'는 것이 강의의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이론과 지식은 잘 알고 있으나 삶을 통한 곡조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들은 복음, 그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말씀을 정리하면서 문득 다음과 같은 비유가 떠오릅니다. 적정한 비유는 아닐 수 있지만, 말씀이 의도하는 목적은 캐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7~8년 전 첫째딸의 혼사를 앞두고 수 많은 날을 준비하고 걱정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정에서의 혼사는 대사 중의 하나입니다. 결혼식 당일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하고 일찍 예식장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파김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딸을 키워서 시집을 보내는 가장 즐거운 날에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손님들인 듯 했습니다. 결혼식이 일이 되고, 그 일을 하는데 온 신경을 쏟고, 정작 아내와 나는 혼사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복음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 주신 복음의 은혜를 즐기는 삶, 그 삶을 통해서 저절로 복음의 곡조가 흘러나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를 삶을 살려면 ...
1.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은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복음의 반에 해당될 뿐입니다.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가?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이 더해져야 합니다.
본장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느 단어는 '합하여'와 '함께'입니다.
그럼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나의 무엇이 죽었다는 것일까? 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나의 옛사람, 나의 자아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내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자아를 죽일 수 있을까요? 70대가 되면 죽일 수 있나요? 80대가 되면 죽일 수 있나요?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까? 평생을 자아를 죽이려고 몸부림치지만 욕심과 자아는 죽이기는 커녕 더욱 더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아는 우리가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내 자아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내 자아도 죽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십자가 죽음과 함께 내 자아도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할 때, 우리의 자아는 진정으로 죽게 됩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도 모함을 받을 때가 있고, 곡해나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했을 때 한 선배가 A4용지 가득 나에 대한 오해를 적은 글을 넘겨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그 분은 미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읽어보니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마음 고생 끝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내 자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자 분노와 상처 투성이였던 제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에 내 자아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자존심, 분노, 상처 등 모든 자아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의 평강의 곡조를 부르며 살게 됩니다.
2. 십가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바울은 되고 우리는 안 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고백'의 차이입니다.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여길지어다'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는 '간주하다, 결론을 내리다, 결정하다'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믿고 고백하고 그 고백한 대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것을 믿고 취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습니다.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 속에 자아가 죽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내 자아도 죽었다고 하는데, 느낌과 감정으로는 안 죽은 것 같습니다. 믿음의 경지까지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혼한 젊은이가 결혼 후에 아내와 떨어져서 주말부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결혼 생활에 대해 자꾸만 '느낌이 안 와요' 했습니다. 분명히 결혼식을 하고 결혼을 했는데도, 삶의 느낌은 결혼한 사람의 느낌이 안 온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의 확신, 즉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한동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김영길 총장의 부인인 김영애 권사님이 쓴 '갈대상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총장님이 심한 수치와 치욕을 당하시고 귀가하셨습니다. 사모님은 남편이 큰 상처를 받아서 의가소침해 할까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총장님은 밥도 잘드시고 잠도 곤히 잘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사모님이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잠이 오세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총장님은 "죽었는데 뭐" 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고백하고 누리는 삶의 대표적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낌을 부여잡고 어정쩡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고 부활의 은혜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우리'가 아닌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복음의 핵심 서신서로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완벽히 이해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로마서를 복음의 또 다른 바이블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로마서는 일반적인 복음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본인의 복음은 오히려 갈라디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라는 단어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되고, 갈라디아서는 '나'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개인적 복음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절 20절입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 복음이 우리를 넘어서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에 이를 때, 그것이 내 신앙이 되고, 진짜 복음을 경험하는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중요할 때도 있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의 은혜를 통한 곡조가 있는 삶을 살려면 내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노래는 내가 경험한 인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만번 응답받은 조지 뮬러는 자신이 놀라운 은혜의 인생을 살게 된 배경에는 자신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의 칭찬이든 책망이든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조지 물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의 죽음'의 고백이 응답받는 자기의 능력이 된 것입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신학교 입학 수준이 그렇게 높은 자들만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딸려서 신학교에 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유학에 대한 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다 유학을 갔는데, 나만 가지 못하는 사정이 되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대신에 국내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밟기로 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박사 과정에 있을 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내게 물으셨습니다. "네 박사학위 내게 바칠 수 있겠냐" 난 거절했습니다. 이것이라도 있어야 뒤지지 않게 되지 않느냐고, 이것도 포기하면 세상에서 끈 떨어진 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걸 어쩌겠습니까? 백기를 든 대신에 전 제대로 된 끈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때도 나는 내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림으로써 날마다 자기 복음의 곡조를 부르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