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3_설교정리_내 영혼에 터치 하심이 있을 때 (롬3:20~23)
○ 말씀 전문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받은 말씀
신앙은 믿음이 그 바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눈으로 보고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척도로 삼게 되는 것이 신앙에 대한 '체험'입니다. 이 신앙 체험에는 본질적인 몇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터치라는 '궁극성'입니다. 둘째는 삶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흔들게 되는 '전체성'이고, 세째는 하나님의 터치로 인해 찾아오는 '강렬한' 느낌이며, 네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이 모습이 완전히 변하게 되는 '행함'입니다. 육체적인 체험이 타인의 손길이 내 몸에 닿아 그 터치를 느끼듯이, 이 본질적 요소가 내게 임할 때 우리는 영적인 터치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희열은 바로 이 하나님의 터치가 있을 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아침마다 큐티를 하는 것도 이 영적인 터치를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예배를 드리고, 같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부터 받게 되는 결과는 다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터치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그냥 육체적으로 귀를 통해 들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때 들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그 이해와 깨달음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귀로 들리는 것에서 끝내는 것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듣는 사람까지 무수한 수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게 되는 은혜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터치하심이 있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
1.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고, 두근거림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있고,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정확히 만나게 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첫 반응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알게 될 때 죄인이라는 느낌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정확히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7절과 8절입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세상적 상식으로 보면 고기를 가득 잡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춤출 일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좋아하기에 앞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부터 느꼈습니다.
바울의 시대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로마서 3장 9절과 10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들은 그래도 난 이반인이나 헬라인 보다는 낫다 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진단한 결론은 어떤가요?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유대인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제자는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베드로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정확히 만난 사람이 베드로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정확히 만난 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변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터치하심, 즉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가기를 원합니다. 그 원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터치함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어떨 때 우리가 터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30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성령이 찾아주시고 그 성령이 말씀을 열어줄 때 우리에게는 깨달음의 역사가 찾아오게 됩니다.
2. 나의 의가 아닌 그분의 의로 사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려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도 잔뜩 챙겨먹고 열심히 운동도 합니다. 그러나 병원들은 아픈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세상은 우리의 노력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확히 만나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때,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또 한가지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살고 싶어합니다. 열심히 살거나 착하게 살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실감할 것입니다.
루터는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오르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여깁니다. 수많은 주교들이 고행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행을 한 후의 그들의 삶은 여전히 타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실망감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고행으로는 구원을 얻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보고 바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면 율법도 구원의 완전한 통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19절과 2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저는 율법은 X-Ray에 비유합니다. 뼈가 골절 되었는지 부러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서는 X-Ray를 찍게 합니다. 그러면 어느 부위에 골절이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X-Ray를 찍더라고 X-Ray가 그 골절을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영혼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려 줄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의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터치가 임하게 되면 우리는 나의 의에는 한계가 있고 주님의 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있는 오늘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이시다.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에서 진리는 무엇일까?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고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다가도, 문득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얻은 월급으로 자식들 공부하는데 다 쏟아붓고,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다가도 문득 내가 제대로 살고 있기나 한 것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도 내가 정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질문이 계속 될 때 제 눈에 들어온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3절부터 18절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 중에서도 특히 16절과 17절이 오래 묵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내가 지금 붙잡고 가는 길처럼 여겨졌습니다. 아울러 내가 되찾아야 할 길은 바로 평강을 찾는 길이구나 싶었습니다.
돈을 원없이 벌었다고, 높은 권력을 쥐게 되었다고 그 평강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두렵고 걱정스런 마음만이 커져 갈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평강으로 가는 길, 그 진리의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터치를 받게 되면, 내 인생을 평강으로 이끌어 줄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딱 하나만 가져도 아깝지 않는 진리의 길, 그 예수님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방해하는 적, 현대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3가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조급함, 소음, 군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에 유혹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터치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의 음성게 귀를 열고 세미한 하나님의 터치하심에 민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터치 하심에 화들짝 놀라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